소설) 알로하(윤고은)
회사 주변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여자 노숙자가 있다. 살을 에는 겨울에 라면박스를 펴고 쪼그려 앉아 있다. 외투에 달려있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배낭을 메고 앉아 있는 모습은 ‘앉아 있다’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옷더미가 뭉쳐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계단에 여자 노숙자는 그저 앉아 있다. 어떤 사연이 있을까? 다양한 사연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타인의 인생은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요즘 세상은 타인에게 관심을 가질만한 여유를 주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술을 마신 그날 밤도 여자 노숙자는 계단에 있었다. 시장에서 국수를 한 그릇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전했다. 나이가 늘어나면서 점점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을 발견한다. 여자 노숙자에게도 이런 생각을 하던 날들이 있었을까?
「알로하」에도 노숙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사회에서 소외받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이들. 그들은 그들이 살던 곳에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다른 공간의 이동이 이뤄지고, 그들은 삭제된다. 아무도 그들이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상관하지 않는다. 자본과 프로들의 세계에서 패배자가 된 그들은 타인의 목적에 의해 이동하고, 사라진다.
당신은 서류상으로 이미 오 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아마도 오래전에 누군가에게 신원을 팔았을 확률이 높았다. 노숙자들의 신원을 사서 보험금을 타내는 사람들도 종종 있었고, 국적세탁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건 아주 흔한 줄거리였고,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었으나, 기사화할 수 없는 오류이기도 했다.
-알로하(윤고은)
인간이 어떤 소모품처럼 대체된다. 아니, 돈으로 바뀌거나, 물건으로 바뀌기도 한다. '미친 스펙의 시대'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물건처럼 취급된다. '타자(他者)의 욕망(慾望)'에 의해서 본질을 잃어버린 채, 보이는 것, 보여 지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알로하」의 화자는 기자다. 취재를 하는 도중 노숙자 윤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알고 보니 이야기는 신문에 나왔던 내용들이다. 역시 '타자(他者)'의 이야기다. 결국 이렇게 모인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오류에 빠진 인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타자에 의해, 타자를 위해, 타자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노숙자에서 유기견의 모습을 본다. 함께 살던 애완동물을 경제적인 이유로 버리고 온다. 특별히 어떤 장소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저 먼 곳, 깊은 숲,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그런 곳이면 된다. 유기견과 같은 노숙자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찾아낸 깊은 숲과 같은,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하와이'일지도......
유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