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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없는 것

소설과 영화) 벌레 이야기(이청준), 밀양(이청동)

by 유병천

중세시대에서는 가능했을까? 절대적인 위치에 존재하는 신의 용서가 모든 것을 덮을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때에도 인간은 분노하면서도 울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을까? <벌레 이야기>는 인간의 삶이 두 번에 걸쳐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은 희망이 있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 일요일보다 금요일을 좋아하는 이유가 다음 날의 휴식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반면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은 다가오는 월요일로 괴롭다. 이렇게 희망에 대한 본성은 구스타프 융이 말한 집단 무의식에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약한 존재다. 특히 아이를 가진 부모에게 아이를 빼앗는다는 것은 가혹하고도 가혹하다. <벌레 이야기>에서는 남자가 화자로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영화 <밀양>에서는 남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설 속에 없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창동 감독에 의해 재구성된 <밀양>은 원작보다 가슴 아프다. 소설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울음소리도, 분노의 소리도, 절망의 울부짖음도. 영화 이야기를 더욱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먼저 화자의 시점이 다르다. 소설은 남편의 관점에서 이야기하지만, 영화는 아내인 당사자가 직접 모든 일을 겪는 과정을 보여준다. 남편이 죽고 그 남편을 기억하는 모든 것이 없는 밀양으로 간다. 비밀 그리고 빛. 여주인공은 비밀을 가지고, 새로운 희망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밀양은 고통에 고통을 더해주는 곳이 된다.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려는 그녀에게 아이의 유괴와 죽음은 희망을 송두리째 뽑아버린다.


그 후 찾아온 하나님과의 만남. 그것은 인간의 살려고 하는 본능일 수도 있다. 의지할 곳을 찾아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본능에 대한 또 한 번의 절망이 이 소설과 영화의 주제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가장 큰 사랑은 ‘용서’이다. 그 어려운 사랑을 주제로 질문을 던진다.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과 신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 사람이 용서하기 전에, 신이 먼저 용서한 것을, 과연 사람이 이해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럴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원수다. 서로 용서할 수 없는 사이인데, 한 사람이 거룩한 사랑인 용서를 행하려고 한다. 용서를 통해서 자신의 삶을 회복하려는 마지막 노력이다. 그러나 원수를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다른 누군가 벌써 용서를 했다. 그 다른 누구는 자신이 삶을 의지하려고 하는 대상이다. 이것은 인간이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과 다르다. 절망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가려는 처절한 노력에 대한 배신이다.


인간은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칭하지만, 정말 나약한 존재다.



유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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