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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니아니 May 26. 2022

#26 부모, 기다림의 미학

대안학교 10년차 엄마의 리얼체험기


교육은 지속하는 힘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이 처음 대안학교에 입학한 이후부터 입니다. 옛 어른들은 이따금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지속성 보다는 방향성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사실이지만 일단 올바른 방향 설정이 되었다고 판단이 되면 이후로는 힘들고 어려운 난관에도 끝까지 지속하는 힘이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대안학교에 보낸 이후에 제가 줄곧 생각하고 다짐해 온 것들 중에 하나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녀 교육의 방법에 있어 정답은 없겠지만 일단 대안교육을 시키기로 마음먹은 이상 우왕좌왕 하지 않고 끝까지 이 길위에서 잘 마무리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지나온 10년 이라는 시간은 저에게나 아이들에게 모두 중심을 잡고 가치로운 생각에 뿌리는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공립학교를 다니는 기간도 초중고를 합치면 12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고 그 안에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안학교에서 10년 동안 자녀 교육의 철학을 지켜내는 일 또한 인내와 기다림이 요구되는 일이었습니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기다려주는 것만큼 사실상 부모로서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자식은 못 가르친다는 말도 괜히 나온 말이 아니겠지요. 부모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기쁨과 감동과 그만큼의 고통이 함께 따르는 삶인 것도 같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게 없으면 자식이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식에게 바래서는 안되는 바랄 수 도 없는 그런 바램을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고 또 그로인해 크고 작은 갈등을 마주하는 것이 어쩌면 부모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자식 만큼은 힘들게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램, 어떤 상황에서든 자존감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램, 크고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자신의 삶에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바램들 까지도 모두 내려 놓아야 비로소 부모든 자녀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대안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면서 제 나름으로는 아이들에 대한 많은 바램들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공부를 잘했으면 하는 바램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바램도 모두 마음에서 지우고 오직 아이가 행복하게 자신의 꿈을 찾아간다면 그걸로 만족스러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웬 말입니까. 오히려 자식에 대한 욕심 하나를 내려 놓으니 그 자리를 채우려는 더 큰 욕심이 생겨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이가 스스로 꿈을 찾아가게 만드는 과정 역시 수없이 많은 바램들의 연속이었습니다. 결국에는 수 많은 시행착오와 좌절의 시간들을 겪고 난 이후에야  완벽하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만큼 이 세상에 힘든 일은 없다는 것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성장해 가는 동안 위기와 갈등의 상황은 언제고 예고없이 펼쳐졌습니다. 그때마다 아이도 저도 똑같이 힘들고 어려운 아픈 시간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아이는 부모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하더군요. 엄마는 이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어떤 말을 하게 될까 머리속으로 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부모됨이 정말 어렵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나의 아픔과 고통을 다루어 가는 과정이 누군가에게 삶의 지표가 되고 그대로 배움의 현장이 된다는 사실이 정말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성정이 날때부터 부드럽고 예민한 아이였습니다. 물가가 아니라 대문 밖에만 내 놓아도 불안할 정도로 여리고 다부지지 못해서 언제나 손을 잡고 다녀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어릴때부터 엄마의 껌딱지 였고 자라는 동안에도 유독 섬세한 마음결 때문에 별거 아닌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고 슬픔에 빠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저는 그런 감성적인 아이가 못마땅하게 여겨질때가 많았습니다. 그냥 훌훌 털어버리면 될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를 앞에두고 엄마로서 어찌할 바를 모르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험한 세상 살다보면 힘든 일도 한두가지가 아닌데 고작 이런 일 가지고 슬픔에 빠지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마음결이나 감정선이 그렇게 예민하다보니 감정 관리 하느라 정작 중요한 일들은 항상 뒷전이었습니다. 대안학교에 처음 입학해서는 친구들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때문에 감정을 다루느라 에너지를 쏟는데 모든 시간이 다 들어갔고, 인도 이동수업을 떠나있던 8개월 동안은 다른 아이들보다 유독 집 떠난 그리움과 슬픔의 시간이 길고 고통스러울 만큼 힘겨웠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좀 괜찮아 질까 생각했지만 타고난 본성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이를 키우다 보니 첫째 키울 때보다 열배는 더 힘들게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의 섬세한 마음은 그대로 였고 언제든 감정이 다운되고 힘들어질 것 같은 불안한 마음으로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절로 아이에 대한 기대감과 욕심은 점점 더 내려놓게 되더군요. 사실 이런 고백을 하는 게 저에게는 힘든 일입니다. 제 안에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제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모습이 곧 나의 양육의 결과인 것 같아서 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못마땅한 모습이 보일때마다 괴로움의 정도는 심해졌습니다. 그렇게 예민한 아이가 집을 떠나 무려 8년 동안이나 기숙학교에서 지내온 것이 지금 생각하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얼마나 스스로 노력하고 단단해 지기 위해 애써왔을까 그리고 지금도 부단히 애쓰고 있을까 말하지 않아도 엄마 눈에 훤히 보이니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저려옵니다. 이 녀석에게도 대안학교가 좋은 교육환경이었을까? 아이를 생각하면 늘 짠한 마음이 들어 그런 질문을 이따금 했습니다. “엄마가 너를 너무 일찍부터 기숙학교로 보낸건 아닐까? 좀더 엄마랑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아이는 저에게 펄쩍 뛰면서 말합니다. 자기는 대안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이죠.


살아보지 않을 길을 우리가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그렇게 엄마의 선택과 자신의 선택을 긍정하고 또 지난 시간을 감사하게 생각해주니 그래도 다행입니다. 둘째를 대안학교에 보내고 키우면서 ‘기다림’에 대한 생각을 정말 많이 했습니다. 자녀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다림의 끝은 존재하는 것일까? 자녀에 대한 기다림은 기다림이 아닌 수용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냥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그걸 기다림이라고 잘못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변했고 단단해 졌는지 보다는 오히려 제 자신이 얼마나 기다림에 익숙해졌는지 기다림의 참뜻을 깨달아 왔는지 질문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아이는 그러는 동안 엄마의 바램대로 변해왔다기 보다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섬세한 감정을 읽어주는 일까지 관심을 넓여가고 있습니다. 엄마가 별거 아니라고 치부해 버렸던 작은 자신의 감정도 소중하게 여기고 왜 엄마와 자신이 다른 감정선을 가질 수 밖에 없는지 논문을 쓰며 연구하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부모의 길을 걸으며 우왕좌왕 하는데 아이는 아픔 속에서도 저보다 더 단단하게 딛고 일어서고 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건 애초에 기다린다는 생각을 버리는 건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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