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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Feb 23. 2022

<드라이브 마이 카>,
설원과 닮은 침묵으로

…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 건 내겐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보는 것, 듣는 것은 가능하죠. 때론 말보다 많은 걸 이해하는 것도 가능해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수어로 소통하는 이유나(박유림)는 연극이 힘들지 않으냐는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그녀는 안톤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새롭게 연출한 가후쿠의 의도를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가후쿠는 일본어, 중국어, 한국어 심지어 수어까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배우들을 한 무대에 올린다. 언어로 전달되지 못하는 것들, 언어 이상의 순간들이 피어나길 바라길 가후쿠의 연출을 처음엔 다들 버거워한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지루하고 감정을 실을 수 없는 상황은 답답하다. 그러나 익숙한 언어를 사용한 표현이 불가능해진 상황은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다른 감각을 일깨운다. 이윽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배우들은 다른 방법으로 교감의 통로를 찾기 시작하고, 그때 가후쿠는 말한다. “좋아. 지금 뭔가 일어났어. 아직은 배우들 사이에만 일어난 일이야. 그다음 단계가 있어. 관객에게 그걸 열어가. 하나도 빼먹지 말고 극장에서 다시 재현해.”



말과 침묵 사이에 깃든 영화의 언어


말은 소통의 필요조건이다. 최소한이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지만 그걸로 온전히 마음이 전달되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말은, 차라리 서로의 진심을 감추기 위한 안전지대에 가깝다. 합의된 오해라고 해도 좋겠다. 그곳에서 우리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내고, 보고 싶은 대로 상대를 파악하며 머문다. 마치 영원히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여기엔 중대한 착각이 있다. 말은 단지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말의 감옥에 갇히면 어느새 그 틀 안에서 사고를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문자와 말 이외 다양한 경로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곤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진심을 대면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상처와 내면을 그린다. 다만 이건 언어의 불완전함, 소통의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언어의 확장에 관한 통찰이다. ‘영화언어’ 역시 그중 하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사별한 아내의 불륜을 알게 된 한 남자의 방황과 정처 없는 내면을 그린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여기에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겹쳐 거대한 은유의 경로를 만들어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는 항상 말이 먼저 도착한다. 다만 본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장소에 당도하여, 일종의 은유로 작동한다.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통째로 복기하는 가후쿠의 붉은 사브 내부는 또 다른 연극 무대다. 어쩌면 가후쿠의 마음속 깊은 장소가 무대화된 곳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토가 죽은 뒤 가후쿠는 더 이상 바냐 역을 연기하지 못한다. 바냐의 대사에서 자신이 묻어버린 진심을 발견하고 견디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장면, 2년이 시간이 흘렀지만 가후쿠는 여전히 차 안에서 아내가 녹음해 준 대사들을 듣고 있다. “그야 물론이지. 내 생각엔 진실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든 그렇게 두렵지 않아. 가장 두려운 건 그걸 모르고 있는 거야.” 이것은 연극 <바냐 아저씨>의 대사이자 아내가 전하는 말인 동시에 가후쿠가 듣고 싶었던, 들어야만 했던, 언젠간 들을 수밖에 없는 진실이다.



오즈 야스지로의 계승자가 선보이는 ‘쿨 앤드 클래식'


<드라이브 마이 카>는 극중극의 형식을 빌려 대사(혹은 말)를 장면 곳곳에 흩뿌려놓고 소박한 은유를 만들어낸다. 이것이 은유로 작동하는 이유는 하나다. 말의 발화자와 시제가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먼저 도착한 말의 의미를 장면들이 따라잡을 때까지, (영화라는 이름의) 다른 언어가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기다리는 영화다. 오프닝 시퀀스의 완료를 알리는 출연 크레딧 자막이 스크린에 불이 켜지고 무려 40분이 지나서야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냐 아저씨>의 연기 연습과정을 다 보여줘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말에 갇힌 언어가 몸에 스며들기까지의 시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뭔가 일어나기까지의 시간’. 내가 너를 이해하는 데, 아니 내가 나를 이해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하마구치 류스케가 이런 종류의 시간들을 담아내는 방식은 매우 고전적이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열정> 이후 이어진 자신의 작업을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라 표현한 바 있다. 다큐멘터리적인 시선과 극영화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의 카메라는 오직 배우를 향한다. 정확히는 배우를 둘러싼 시간, (가후쿠가 말했던) ‘지금 무언가 일어난’ 시간을 담는다. 의도 없는 우연까지 모조리 담는 게 아니다. 말이 마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면, 정확한 점을 찍을 수 없다면 차라리 말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순간들이 형성되는 시간까지 전부 담아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카메라가 의도를 초과하는 장면들을 포착하는 기술이라 해도 좋겠다.


영화언어의 오리지널리티는 시간을 붙잡는다는 데 있다. 영화는 말과 글에 담긴 정보와 의도에 그치지 않고 그 앞뒤의 공백, 침묵, 분위기와 태도까지 모두 담아낸다. 하마구치의 카메라 역시 말과 글의 갑옷 밑에 갇힌 진심들이 인물은 물론 장면에 충분히 스며들 때까지 동참한다. 우아하고 단정하고 아름답게. 하마구치 류스케가 오즈 야스지로나 나루세 미키오의 적자로 불리는 건 단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이나 무력하고 방황하는 남성에 대한 탐구심 때문만은 아니다. 중요한 건 태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설득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로고스-논리, 파토스-감정, 에토스-태도. 하마구치의 진가는 단순한 기교나 고전적인 연출, 카메라의 문법이 아니라 카메라를 든 태도 그 자체에 있다. 먼저 출발한 말(논리)과 꾹꾹 눌러담았던 진심(감정)의 벌어진 거리는 마침내 새하얀 눈과 함께 내린 정적과 침묵(태도)을 거쳐 당신 앞에 하나의 의미로 거듭난다. 우리는 그걸 ‘영화(언어)’라고 부른다.


- 송경원, '드라이브 마이 카'와 하마구치 류스케 작가론 (2021.12.30 씨네21) 中

http://m.cine21.com/news/view/?mag_id=99388







송경원 평론가가 앞서 말했듯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거대한 은유’로 견인되는 영화다.

남의 차를 대신 모는, 즉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운전(수). 오직 한 사람분의 목소리가 빈 녹음테이프. 나머지 목소리를 녹음해 준 사람의 죽음. 한쪽 눈이 서서히 멀어가는 녹내장. 언어가 달라 서로의 대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연극. 상처를 치유하는 여정의 마지막 단계였던 설원의 고요 등, 이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부재를 낭만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동반자의 부재와 진실의 부재를 견디는 주인공 가후쿠는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를 연출하며 그것이 곧 자기의 실존적 부재와도 직결되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뼈저리게 깨닫는다. ‘25년 동안 남의 자리에 있었던’ ‘허송세월’한 바냐와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동일시하면서, “내 리듬으로 대사를 하면 딱 다음 대사가 나오죠”라고 말하며 나의 고유한 '리듬'을 아무런 부연 없이도 알아채주던 이의 상실에 몸서리치게 슬퍼하면서. 그는 “내 생각엔 진실은 무엇이든 그리 두렵진 않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것을 모르는 것이다.”라는 대사에 몇 번이고 남몰래 무너진다. 오토가 숨겼던 것들과 자신의 비겁함 중 어떤 것이 더 아픈 진실인지를 가려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로 그럴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직시 대신 회피를 택했던 성정은 오토의 죽음 후에도 나아지질 않아서, 아니 오히려 더 심각해져서 가후쿠는 여전히 모든 걸 흐릿하게 보고 최대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세 개의 만남이 그를 다른 곳으로 훌쩍 끌고 간다.


가후쿠와 오토의 딸이 살아있었다면 똑같은 나이였을, 그 자신도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된 지 오래인 운전수 미사키.

오토의 죽음 직전에 그녀의 불륜 상대였던 젊은 남배우 다카츠키.

한국인 코디네이터-비청인 배우 부부인 심윤수와 이유나.


결말 부분 그가 내보인 모습은 치열하고 치밀한 고뇌에 따른 '극복'이라기보다는 이 만남들에 의해 '견인되고' '떠밀린' 것에 더 가까웠고,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미사키라는 캐릭터와 그를 연기한 배우 미우라 토코의 놀라움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글말이 나왔으니 더 이상 얹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가후쿠에게 주어진 자극 중 미사키와의 드라이빙이 가장 강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던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설원 씬에서 두 인물의 폭발하는 감정을 담은 다이얼로그가 그다지 자연스럽지 않다고 느꼈다. 미사키의 옛집을 찾아가는 긴 여정 중 설원을 배경으로 한 그 긴 대화가 가장 사족 같기도 했다.


하지만 미사키라는 인물 자체의 비범함과 덤덤함은 정말로 매력적이었다. 자길 학대한 엄마의 또 다른 인격이었던 어린아이 사치 이야기. 오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여전히 힘겨워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가후쿠를 향해 “어떤 거짓과 모순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이상한가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내놓는 통찰. “운전을 가르쳐준 자체는 엄마에게 감사해요. 자신을 위해서기는 했지만, 가르쳐줄 때는 상냥했어요.”라며 상처에서 사실과 감정을 명확히 분리해낼 줄 아는 굳은 마음까지.

상처 많은 중년 가후쿠가 (오히려) 조연이고 아직 살아갈 날이 너무 많이 남은 미사키가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좋았다. 엔딩씬이 가후쿠가 아니라 미사키를 비추는 숏으로 이뤄진 것도 사실 가후쿠로 말미암아 함께 과거를 직시할 힘을 새로이 다진 / 더 젊은 미사키의 묵묵한 나아감이 서사의 끝을 맺어야 한다는 함의를 담은 것이었을지도.



배우 오카다 마사키가 연기한 다카츠키도 정말로 감탄할 만한 씬이 많았는데, 단독자로서 눈길을 끄는 매력을 발휘하는 것만큼 다른 인물의 대사를 떠받치는 힘이 좋은 배우고 그렇게 설계된 인물이라고 느꼈다. 오토의 죽음 이후 가후쿠와 처음 독대한 바에서 다카츠키는 “부정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저 가후쿠 씨를 질투하고 있어요. 용서해 주세요.”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지만, 그가 내비치는 감정은 단순히 적대감이나 질투 일색이 아니다. 한때 존경했던 선배 연출자를 향한 여전한 동경, 절대 넘어설 수 없는 연적을 더 잘 알고 싶다는 집착적 호기심, 자기혐오와 분노와 허무가 한데 합쳐져 어룽거리는 마음. 그런 것에 고질적인 민감함을 한 스푼 더해 만들어진 젊은 다카츠키의 초상이 예상외로 정말 흥미를 끈다.


그래서인지 가후쿠의 대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도 대부분 다카츠키를 향한 것들이었다. 유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를 보살폈던 미사키와의 관계보다, 자길 드러내놓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닮고 싶어 하는 다카츠키와의 관계가 당연하게도 가후쿠의 뾰족한 면을 더 자극했으리라.

“체호프는 두려워. 그의 대사를 입에 올리면 나 자신이 끌려 나와. 못 느꼈어? 그걸 느끼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졌어.”
“자신을 바쳐 대본에 응답해.”

가후쿠와 재회하면서 다카츠키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일종의 신변 정리를 한 것처럼, 가후쿠 역시 다카츠키로 인해 자신의 약함을 제대로 마주한다. 미사키가 가후쿠의 선함을 알아봐 주고 그의 1보 전진을 도왔다면 다카츠키는 완전히 반대의 방식으로 -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손가락으로 헤집는 수준의 잔인한 솔직함으로 - 가후쿠를 나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다카츠키의 이 대사도 한 번 더 생각해 볼 만하다.

“가후쿠 씨. 나는 텅 비었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어요. (…) ‘대본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그걸 오토 씨의 각본에서 처음 느꼈어요.”

미사키나 가후쿠의 이유 있는 공허와는 또 다른 다카츠키의 공허. 이유가 없기 때문에 더욱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는 종류의 공허를 축적하면서 다카츠키는 아주 전형적인 방식으로 자멸을 향해 달려간다. 젊고, 예민하고, 섬세하고, 그만큼 공격적이고 미숙한 사람을 위해 정해진 운명 같은 자멸.


그는 불길한 긴장감을 극 내내 조성하다가 관객이 반쯤은 예감했던 결말을 맞으면서 퇴장하는데, 그때 남기는 말도 인상적이다. "옷 갈아입어도 돼요?" 연행되기 직전의 범인이 내뱉기엔 지나치게 차분하고 맑은 이 말은, 오토가 주선했던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짧은 첫 만남 당시 가후쿠가 '옷을 갈아입어야 해서 실례하겠다'며 그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대사를 떠올리면 더욱 기묘해진다. 배우가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즉 무대에서 내려와 현실로 돌아올 준비를 한다는 것. 가후쿠에게 깊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그렇게 잡혀가면서 그는 생애 처음으로 '텅 비지 않은' 평온한 진실을 마주한 것처럼 보였으니까. 어쩌면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중에 서로를 가장 닮은 건 미사키와 가후쿠도, 오토와 가후쿠도 아닌 다카츠키와 가후쿠 아니었을까.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가장 인상적인 건 이유나와 심윤수다. 사실 이유나와 심윤수가 등장하는 모든 장면이 다 아름답다. 한국 수어를 사용하는 이유나의 힘 있는 침묵을, 한국인 코디네이터 심윤수가 일본인 연출자 가후쿠에게 육성의 일본어로 전달하는 그 오디션 씬... 이게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 될 거라고 초반부터 섣불리 단정 지어 버렸는데, 영화는 언어의 아름다움이 (그리고 그걸 동적인 화면 안에 잡아두는 영화라는 매체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보여주겠다는 듯이 계속 계속 놀라워지기만 한다. 박유림 배우의 맑은 눈이 그려내는 이유나-소냐도 너무너무너무. 너무. 좋았고 진대연 배우의 선하고 온화한 얼굴도 정말 정말 좋았다. 주인공보다 더 궁금해지는 유일한 인물들. 유나의 소냐 연기를 다시 보기 위해서 이 세 시간짜리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볼 수도 있을 만큼 마지막 장면의 울림이 깊었다.


유나의 언어는 곧 청인들의 침묵. 청인의 의아함과 뒤늦은 깨달음, 그것이 불러온 일종의 부끄러움이나 이어지는 열렬한 집중까지. 그런 것들을 모두 내포한 게 유나의 수어다. 유나의 언어는 미사키처럼 천천히 자기를 열며 다가오지도 않고 다카츠키처럼 쿵쾅대며 난폭하게 거리감을 깨부수지도 않고, 그저 스며든다.

그 스며듦의 미학을 일찌감치 알아본 동반자 윤수의 온화함과 유능함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유나와 윤수 부부의 소통을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면서 가후쿠는 어쩔 수 없이 자신과 오토 사이의 간극을 다시 한번 체감했을 것 같다. 유나에게 첫눈에 반해 수화를 배웠다는 윤수의 얘기와, “제가 100인분 들어주기로 했어요”라던 다정하고 비장한 다짐.

사랑해서 이해하고 싶었고, 이해하려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했고, 그렇게 해서 결국 편안한 합일을 이룬 연인들. 누구보다 사랑해서 함께 살았던 건 분명한데 꿈과 이야기만큼 멀어졌던 생전의 오토를 회상하며 가후쿠는 미치도록 슬퍼지지 않았을까. 미사키까지 네 인물이 둘러앉은 밥상이나, 유나의 소냐가 수어로 전하는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대사에서 가후쿠의 얼굴에 눈물이 고이진 않았는지 염려하는 마음으로 살피게 된 건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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