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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Mar 28. 2022

에드워드 양, 가엽고도 불온한

<하나 그리고 둘> & <공포분자>, 220206


뭔가를 잘 알아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거라면 또 몰라도, 뭔가를 잘 모르는 채로 싫어하고 좋아함을 섣불리 결정하진 말아야겠다고 새삼스럽게 재고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있다. 올해 2월에 본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이 그랬다.

3년 전 '대만 뉴웨이브를 선도'한 감독이라는 수식어만 보고 매료당해선 에드워드 양의 첫 영화로 <타이페이 스토리>를 봤고, 지금 읽기엔 정말 민망한 혹평을 남겼다.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 그러나 알고 보니 감독의 가장 특징적인 기법이라는 - 생략과 갑작스러운 폭력성을 탓하며 지루함과 혼란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는데. 그간 참을성을 좀 더 기르기도 했고, 나보다 영화 보는 눈이 훨씬 섬세한 친구들이 몇 년 간 입을 모아 <하나 그리고 둘>을 극찬해서 다시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2월 첫 주말 에무시네마 특별 기획전으로 <하나 그리고 둘>, <공포분자>를 보게 되면서, 내가 불친절함으로 기억해온 에드워드 양의 창작자로서의 태도는 사실 그가 견뎌내온 시대적 고통의 산물이란 점을 깨달아버렸다. 어떤 해석이나 좋은 비평을 찾아 읽지 않고도 곧바로 이 사람에게 특정한 시대나 사회에 대한 일관된 정서가 존재한다는 걸 깨닫게 하는 영화. 그런 대단한 영화를 에드워드 양은 꾸준히 만들다 갔고 나는 그 대표작이라는 3부작 중에 첫 영화만을 겨우 본 채로 불호를 말했다는 게 좀 부끄럽고 미안해지는 순간들이 영화관 안에서 자주 찾아왔다.


느리게 찾아오는 허무를 보다 따뜻한 가족을 매개로 해서 아름답게 그린 게 <하나 그리고 둘>이라면 <공포분자>는 정말로 무료함 그 자체를 소재 삼고 거기서 야기된 장난질과 비극을 무심하게 늘어놓은 영화였는데 나는 어쩐지 <공포분자>의 여러 장면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하나 그리고 둘>은 이미지보다는 좋은 대사들을 필사해놓은 글로써 기억되는 영화였기 때문일지도.


<공포분자>에서 계속 지워지지 않는 건 어떤 뜻이 없는 눈빛들. 범죄와 일상의 경계선을 아무렇지 않게 오가는 혼혈 소녀가 호텔 룸에서 억지로 탈의할 때의 그 불안하고 적대적인 눈빛, 남편 이립중을 의심하는 소설가 부인 주울분의 귀여운 눈매와 묘하게 어울리는 표독스러운 눈빛, 이립중이 승진을 위해 동료를 모함할 때의 결의에 찬 눈빛과 총을 들고 홀로 떠돌 때의 정신 나간 눈빛, 사진 찍는 소년의 엄청나게 주제넘은 정의감에 찬 눈빛... 그런 것들이.

결국 <타이페이 스토리>처럼 극단적 폭력성의 발현으로 끝을 맺은 영화여서 더 인상이 진했을까. <하나 그리고 둘>에서도 마찬가지로, 에드워드 양 영화들 속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이 역시 생각지도 못했던 인물을 칼로 찌르거나 총으로 쏘거나 예정된 것처럼 잘 짜인 비극을 맞는데 그때 관객으로서의 감상은 충격이 아니라 슬픔에 가까워서, 이 사람이 겪어냈던 근현대 대만은 이렇게나 쓸쓸하고 불길하고 가엽고 불온한 슬픔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도시였구나, 싶어진다.


가끔은 잘 모르고 반쪽짜리만 보았던 과거들을 모조리 수정하고 싶다.

왜 우리는 처음을 두려워할까요? 매일 하루가 처음과 같은데 말이죠. 매일 아침 새로 시작하잖아요.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지는 못하죠. 하지만 매일 아침 눈 뜨는 걸 두려워하지는 않잖아요.
- 양양, 사람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면 안 돼. 버릇없는 거야. 그러면 기분 나빠해.
- 왜 우울해하는지 궁금해서요. 뒤에서는 알 수가 없잖아요.
- 우울한 건 어떻게 알고?
- 어젯밤에 큰 소리 내면서 싸우더라고요.

- 내가 못 보는 걸 아빠는 보고 아빠가 못 보는 걸 나는 봐요. (각자의 눈에는 보이는 게 서로에게는 안 보이나 봐요.) 두 사람 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 그건 생각 못 해 봤는데.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한 거란다. 찍어서 보여주렴.
- 우리는 반쪽짜리 진실만 볼 수 있나요?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쪽짜리 진실만 보는 거죠.
빈 껍데기 같은 삶이야.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매일 같은 얘기뿐이야. 아침에 뭘 했고 오후에 뭘 했고 저녁에 뭘 했고, 1분이면 끝날 얘기들. 못 참겠어. 내가 너무 초라해. 어쩜 이렇게 보잘것없지? 빈 껍데기 같은 삶을 사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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