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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Apr 13. 2022

<스펜서>,
하나의 유령이 왕실을 떠돌고 있다


작년 처음 알게 된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두 히로인 파울라 베어와 니나 호스를 제외하면, 그리고 그들이 전후 독일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인 난민/피해자 여성을 주로 연기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아마도 동시대 여배우 중 '유령성'의 구현에 가장 최적화된 배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름답고 가녀린 몸, 지쳤지만 형형한 눈빛, 곧게 뻗어나가지 못하고 언제나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가진 이 미인은 '실존하지 못하는/떠도는 여자'의 이미지를 투사하는 창으로서 자기 신체를 오롯이 활용하려는 듯하다. <퍼스널 쇼퍼>나 <어떤 여자들>이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같은 현대극이든, <스펜서>와 <리지> 같은 시대극이든, <이퀄스> 같은 미래 배경의 SF든 가리지 않고, 도시와 농촌이라는 공간성에도 구애받지 않으면서. 그건 어떤 우연이거나 감독들의 디렉팅에 의한 게 아니라 크리스틴 스튜어트 자신의 선명한 의지에 기반해 의도적으로 구축된 아우라 같고, 그래서 이 적극적인 유령성의 실현-반복이 매번 기껍고 놀랍고 반갑다.


<스펜서>에서의 다이애나-크리스틴 역시 제자리를 찾지 못해 마냥 구천을 떠도는 유령처럼 연약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5세기 전의 '처형당한 첩'인 앤 불린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찰스는 헨리 8세, 그의 불륜 상대인 카밀라는 앤 다음으로 헨리 8세의 왕비가 됐던 제인 시무어에 비유된다) 앤 불린의 음성을 망상하거나, 왕가의 냉동고에 숨어 들어가 다음날 서빙될 간식을 집어삼키는 모습에서는 그나마 절박한 생기가 새어 나오지만 다른 장면들에서 그는 너무도 분명하게 먼지가 되어가고 있다. 구토와 자해와 추락을 반복하는, 삶이라고 부르기 힘든 연명.

자유를 갈망하기도 지쳐 말라죽어가던 왕세자비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오마주처럼 달리는 여자가 되기도 하고, 여자에게 사랑받는 여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감정적 폭발이 그의 회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왕실을 탈출한 다이애나가 채 5년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사고로 요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관객으로선, 그의 달리기는 차라리 죽어가는 새의 찢어지는 단말마에 더 가까워 보이니까.

안타깝게도 영화의 만듦새 자체는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플롯은 후반부로 갈수록 급격히 무너지다가 아이들과 차를 타고 도망가는 다이애나의 즐거운 미소로서 소생하는 듯하더니 그대로 재기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다. 다이애나 스펜서를 둘러싼 왕실 어른들의 디렉팅에서도 갈피를 잡지 못한 티가 언뜻 난다. 실제로는 찰스의 불륜을 모른 체하고 다이애나를 방치했다던 엘리자베스 여왕이 이해심 있는 시어머니로 그려지거나, 다이애나의 거식증/강박증 및 이상 행동을 낱낱이 감시하던 그레고리 소령이 내심 그를 동정하는 선인으로 갑자기 둔갑하는 것 정도는 약과다. 불륜으로 결혼 생활을 완전히 부숴놓고 어린 부인에게 잔혹하기 그지없었던 남편 찰스마저 후반부에는 사냥터에 잠입한 다이애나를 이해하고 아이들을 어머니에게 보내주는 좋은 아버지로 변신한다. 파블로 라라인 감독이 일관성의 유지에 실패한 건지 혹은 의도적으로 인물의 복잡성을 나타내고자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실의 실존 인물에 대한 인상이 자꾸만 개입할 수밖에 없는 전기영화로서는 별로 좋은 연출은 아니었던 것 같다.


가장 별로였던 건 (역시 감독이 남성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영화가 여성들 간의 '성애 없는 우정'을 상상하지 못했다는 점. 의상 담당자 매기(샐리 호킨스)는 물론 다이애나의 '어린아이 같은 그 웃음'을 몰래 사랑할 수 있지만, 이전까지 다이애나와 매기가 서로에게 보여준 애착과 이해는 굳이 성애적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웠기 때문에 아쉬움이 남는다. <캐롤>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근 몇 년 간 큰 성공을 거뒀던 레즈비언 서사를 의식한 결과는 아닐까 다소 의심스럽다. 각본가 스티븐 나이트는 익명으로 남기를 바란 실존 인물에 기반해 매기라는 캐릭터를 창작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실존인물 매기가 다이애나를 사랑했고 그걸 정말로 생전의 다이애나에게 실토했다 해도, 아니 그렇다면 오히려 그 갑작스러운 고백에 대한 영화적 개연성이 더 매끄럽게 구축되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I'm a magnet for madness. Other people's madness.

Hold on. Fight them. Be beautiful.
You are your own weapon.
Don't cut it to pie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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