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처음부터 복기하기 전, 엔딩 신의 마지막 내레이션을, 그것이 관객을 데려다 놓은 곳을 먼저 생각한다.
‘사랑해, 개리.’
주인공 알라나가 드디어 내뱉은 사랑의 고백. 그러나 이 고백의 소리는 영상과 싱크가 맞지 않는다. 화면 속 알라나와 개리는 손을 맞잡고 달리는 중이지만 알라나의 입술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전해졌다기보단, 알라나가 차마 말하지 못한 마음의 소리이든가 아예 다른 시간대에서 넘어와 비로소 닿은 알라나의 메시지인 것도 같다. 알라나의 고백이 그때의 개리에게 실제로 닿았든 닿지 않았든 관객은 영화 자체에 대한 두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먼저 <리코리쉬 피자>가 꽉 닫힌 해피엔딩의 로맨스 코미디라는 결론. 그리고 1970년대 캘리포니아 산 페르난도 밸리 골목의 구석구석을 이토록 반짝이고 아름답게 담아낸 이 영화가 폴 토마스 앤더슨 자신의 유소년기에 대한 애정 어린 회고록이라는 결론.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가 과연 그 두 가지 결론을 의도하고 만들어진 영화인지 다시 의심해 봐야 한다. 사실 영화는 해피엔드, 로맨스, 코미디 중 아무것도 담보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PTA가 유년기를 보낸 시공간에 대한 애착‘만’을 남기기 위해 영화를 찍었는지도 확실치 않다.
물론 영화는 PTA가 즐겨 쓰는 여러 레토릭이나 기법을 재현하고 있기는 하다.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부터 그러하다.
- 오프닝씬: 평범한 남자아이 여럿이 모여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학교 화장실.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화장실 바닥이 터지며 물줄기가 솟아오르고, 아이들이 일제히 밖으로 뛰쳐나간다.
- 엔딩씬: 여자아이와 남자아이가 손을 잡고 전력 질주하는 모습이 슬로우 숏으로 펼쳐진다. 여자아이가 줄곧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던 남자아이에게 수줍게 사랑의 고백을 되돌려준다.
예상치 못했던 코믹한 사고의 사운드로 시작해, 질주의 결실을 맺는 감동적 로맨스로 끝맺기. <리코리쉬 피자>와 맥락상 같은 장르를 표방한 <펀치 드렁크 러브>에서도 정확하게 일치했던 PTA만의 문법이다. 그런데 <펀치 드렁크 러브>의 감각적인 미장센과 분위기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내게 <펀치 드렁크 러브>는 멍청하고 폭력적인 남성이 폰섹스를 시도하긴 했지만 실은 유약하고 순진한 심성을 가졌다며 90분 동안 변호해주던 영화에 지나지 않는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 배리는 ‘착하고 순박해서’ ‘억울한 일이 많아서’ ‘그래서 외로워져서’ ‘실수로’ 폰섹스를 하려다 피싱을 당한다. 사업도 잘 풀리지 않고 피싱범 형제들에게 협박까지 당하느라 진퇴양난의 상태에 처한 그의 앞에 갑자기 그의 모든 것을 그대로 이해해주는 신비로운 여자 레나가 나타난다. 레나는 외로움을 달래주는 척하다 돌변해 돈을 뜯어가려던 폰섹스 상대 창녀와도 물론 다르고, 그를 평생 괴롭게 하고 자신감을 깎아먹고 분노조절장애로 만든 일곱 자매들과도 사뭇 다른 여자다. 레나는 배리에게 피싱범을 역으로 협박해 심리적 자유를 되찾을 용기를 주고, 그와 섹스해주고, 그녀를 씹어먹고 싶다고 말하는 이상 성욕에 똑같이 응수해줄 수 있는 여자다.
‘나는 착한데 세상이 나빠서’ 평생 스스로를 깨지기 쉬운 실린더처럼 조심히 다루며 살았던 남자. 그는 여자를 만난 후 비로소 현실 도피를 멈추고 쇠파이프로 자기를 괴롭히는 세상을 때려 부숴 응징하면서 자기 것을 지킬 수 있는 ‘진짜 남자’가 되고, 그 보상으로 여자의 무한한 사랑을 얻는다. 그런데 이 서사에서 레나의 지난 삶과 사랑과 욕구가 어떠한 것인지 드러나는 바는 '이혼 전력이 있다'라는 단 한 문장뿐이다. 심지어 관객은 레나의 성격도 제대로 파악하기 전인데 영화는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말하며 단숨에 끝나버리고 만다. 그래서 내게 <펀치 드렁크 러브>는 절대 로맨스도 코미디도 될 수 없는 영화였다. PTA의 기이한 사랑관에 대한 불쾌한 의심을 품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펀치 드렁크 러브> 이후 20년, <펀치 드렁크 러브>의 변주곡임을 첫 씬부터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낸 <리코리쉬 피자>는 2002년의 유산으로부터 어떤 것을 지키고 어떤 것을 버리고 왔는가.
첫 장면으로 돌아가 보자. 화장실이 폭발해 급하게 도망간 개리와 아이들 앞으로 주인공 알라나가 다가오고 있다. 컨티뉴어스 숏으로 촬영된 해당 시퀀스 전체가 전형적인 여성 성적 대상화의 기법을 따른다. 카메라는 유연하게 알라나의 다리부터 훑고 올라와서 평범한 유니폼과 따분해 죽겠다는 표정을 차례로 담는다. 뭔가를 이루지 못하고 고향 마을에 유폐된 젊은이 특유의 체념 어린 분위기가 그를 감싸고 있고, 곧이어 그 불퉁한 표정에 매료된 개리의 음성이 치고 들어온다.
개리는 알라나보다 열 살 어린 15세 중학생이지만 신기하게도 한참 연상의 성인 여성을 유혹하는 데에 아무 거리낌도 없어 보인다. 그건 개리가 이미 성공을 맛본 아역 배우고 뛰어난 사업 수완을 가졌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함께 운영하는 광고 회사, 클라이언트 성인 남성들이 호모 소셜적 연대감에 기반해 내려주는 후한 칭찬, 일찍이 가정의 경제활동을 도맡은 아이 특유의 능글맞은 자신감까지. 과잉된 자아를 가지기 너무 쉬운 조건에 처한 개리에 비해 알라나는 그쪽 방면으론 너무도 취약 계층이다. 사진사가 알라나의 엉덩이를 갑자기 후려치며 성희롱해도 알라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뿐 한 마디도 화내지 않는다. 주인공 중 적어도 한 명이 성적으로 소비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 굉장히 익숙하다는 사실을 영화 시작 5분 만에 알게 되는 셈이다.
알라나를 유혹하기 위해 개리는 자신이 얼마나 기민한 사업가인지, 얼마나 큰 꿈이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또 알라나에게 묻는다. "이루고 싶은 게 있어? 꿈이라도 없어?" 그러나 엄한 유대교 신자 아버지와 능력 있는 언니들의 존재감에 짓눌린 데다 외모 외의 가치를 제대로 가늠하는 방법조차 모르는 알라나에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바로 그 순간 열 살 어린 개리에 비해 너무도 모자란 비전을, 자기의 결핍을 깨달아버린 알라나는 당황하고 민망해하며 대화의 초점을 개리에게 돌려 상황을 모면한다.
그런데 사실 개리는 배우로서는 전혀 가망이 없는 사람이다. 귀여운 아역이기엔 너무 나이 들었고 뚱뚱해졌고, 무대 위에서 눈치도 없이 아역답지 않은 음담패설을 하는 바람에 감독의 분노를 샀고, 광고 오디션 자리에서도 헐떡이며 옷을 갈아입기 바쁠 뿐 대사는 오버스러운 목소리 한 톤으로 우려먹는 게 다다. 한마디로 보잘것없다. 개리의 연기는 연기라고도 부르기 힘든, 전혀 인상적이지 않은 연기다.
그 오디션장에 등장하는 게 PTA의 파트너인 배우 마야 루돌프다. 결정권자인 남성 디렉터는 끊임없이 개리를 안심시키고 격려하고 칭찬하지만, 마야 루돌프와 다른 어시스턴트 여성은 눈빛을 나누며 개리의 재능에 가차 없는 무언의 평가를 내린다. 마야 루돌프는 개리가 진작 감당했어야 할 진실을 상징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 시절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남자는 제게 요구되는 것보다 조금 덜 하고 못 해도 괜찮다. 다른 덜 하고 못 하는 남자가 그를 온 마음으로 이해하고 끌어줄 테니까. 하지만 그 남자들의 무능력을 단박에 알아볼 정도로 능력이 출중한 여자들은 절대 그 남자들만큼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그저 보조자 역할에 머무를 뿐이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거나, 알더라도 개리의 재능이 아니라 사회적 권위가 중요하기 때문에 별로 상관이 없는 알라나는 개리가 자신에게 열어주는 새 세계에 흠뻑 취하게 된다. 개리의 매니저로 공연에 동행하고, 개리의 동료 아역배우지만 개리보다는 훨씬 성숙하고 잘생긴 랜스와 데이트하고, 개리의 물침대 사업 파트너로 동업하는 등 개리가 알라나에게 제공한 사회적 역할이 지금껏 알라나가 스스로 취득한 그 어떤 역할보다 더 가치 있고 유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알라나는 깨달아 버린다. 능력 있는 남자들과의 네트워킹이 자신을 별세계로 데려다 줄 유일한 창구라는 시대적 사실을. 그때부터 알라나는 자기의 젊고 아름다운 신체를 적극적으로 자원화하는 일에 있어 최소한의 심리적 허들마저 넘어버리게 된다.
개리의 사업 홍보를 위해 비키니를 입은 키키 페이지, 개리의 자위를 줄곧 도와준 프리스비처럼 알라나의 또래 친구지만 개리에 의해 성적으로 소비되는 여자들의 몸이 계속해서 '그런 시대'의 증거로 제시된다. 스튜어디스 브렌다(엠마 듀몬트), 물침대 가게의 브렌다(Iyana Halley)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멀쩡히 일하며 돈을 버는 법적 성인인데 개리 같은 아이에게 아무 맥락도 없이 섹스어필을 하며 여자로 보이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존재 자체로 말도 안 되는 인물들이다. 이 화려한 여성편력 중 알라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것이 개리의 예쁜 동급생인 수 포메란츠인데, 그 애는 (알라나와 친구들처럼)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일말의 순수성을 가지고 있어 개리에게 그것을 ‘돌려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어필 포인트기도 하다. 그 순수성을 이미 '상실'한 알라나는 수의 등장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불안을 느끼며 질투한다. 물침대 개업날 기어이 둘만의 시간을 갖게 된 개리와 수를 알라나가 몰래 관음하는 씬이 하나 나오더니, 알라나가 곧바로 대로해 비키니 차림인 채로 집에 돌아가버린다. 알라나가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능력 있는 남성’ 개리의 소유가 되기로 마음먹은 바로 그 시점에 그에게서 거부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개리와의 관계에서 좌절을 맛본 알라나는 이제 다른 남자들에게 성공의 단맛을 보여달라고 자신을 어필할 차례다. (역시 개리가 주선해 준) 에이전시의 오디션을 통해 깨나 유명했던 배우인 잭 홀든(숀 펜)을 만나게 된 알라나. 잭 홀든은 과거의 영광에 취해있는 미친 나르시시스트고, 알라나의 진짜 이름도 몰라서 다분히 포르노그래피적인 극중 이름 '레인보우'로 불러대는 로리콤 늙은이지만 알라나는 그의 관심이 마냥 흡족할 뿐이다. 알라나는 나이 든 잭에게 교태를 부리고 어린 '그레이스 켈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며 바로 옆 테이블에서 어른 흉내를 내고 술을 주문하는 개리를 정면으로 조롱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시대에 뒤처진 일련의 그림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잭 홀든은 죽지 않은 남성성을 과시하느라 정신이 팔려, 본명을 말하고 싶어 하는 알라나를 내팽개치고 바이크를 출발시킨다. 우스꽝스럽게 뒤로 엎어진 알라나를 챙기기 위해 개리가 대중과 반대 방향으로 홀로 달려간다.
어떻게 보면 개리 역시 알라나를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고 이때껏 자신의 전부였던 것들을 등지고 나아간 셈. 그 밤에 기진맥진해 물침대에 함께 누운 둘의 이야기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면 그나마 아름다웠겠지만, 개리는 그 후로도 몇 번이고 알라나를 실망시키고 배신하고 만다.
개리가 갑작스럽게 살인 용의자로 오인받아 경찰차로 압송될 때 '나는 16세가 되려면 아직 한 달 모자라다'고 항변했던 초반 씬을 생각해 보자. 개리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진짜 어른' 취급을 받았을 때 보인 엄청난 충격과 공포, 사고의 지연. 진짜 용의자가 잡혀오면서 개리는 무사히 풀려나지만 너무 엄청난 사건에 머리가 하얘진 듯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 그때 도시를 가로질러 달려와 개리를 찾아낸 알라나는 ‘이리로 나오’라고 소리 지르고 손짓하고 유리를 두들겨 개리를 순간적 코마 상태에서 꺼내준다.
이때의 알라나가 개리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줄 ‘계기’였다면, 다시 한번 위기가 닥쳤을 때는 알라나 자체가 위기를 타개할 무기가 된다. 개리는 <펀치 드렁크 러브>의 주인공 남성을 연상케 하는 무맥락의 폭력성을 보여준 존 피터스(브래들리 쿠퍼)의 집에 물침대를 설치하러 갔다가, 강렬하고 매력적인 성인 남성의 존재에 괜한 반발심을 느낀다. 이유도 없이 개리의 동생 그렉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존 피터스의 집을 개리 역시 이유도 없이 물바다로 만들고 그의 페라리까지 부수고 몰래 도망치려던 찰나. 개리와 알라나와 친구들을 태운 트럭의 기름이 똑떨어진다. 언덕에 멈춰 오도 가도 못하는 상태에서 신들린 듯한 운전 실력과 순간적 판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한 건 천재적 드라이버인 알라나다. 또 한 번 알라나가 개리를 구한 것이지만 개리는 아직도 ‘내가 알라나보다 부족할 수도 있다’ 혹은 최소한 ‘부족한 면이 있을 수도 있다’는 인정을 하지 않고 있고, 그래서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장할 이유가 없다. 위기를 벗어나자마자 개리는 기름통 호스를 성기처럼 잡고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여전히 철들지 않은 어린애의 모습을 보인다.
한바탕 식은땀 나는 모험을 겪은 알라나는 진이 빠진 채 보도에 주저앉아 그런 개리를 응시한다. 그 순간 알라나에게 저 멀리 보이는 개리는 실제 거리보다 훨씬 더 멀게 느껴지는 타인이다. 알라나의 등 뒤로는 여전히 뭔가를 미친 듯이 때려 부수다가 아무 여자나 잡고 플러팅하는 분조장 섹스광 존 피터스가 지나간다. 주변의 별 볼 일 없는 남자들이 다 자길 무시하고, 통제하려 들고, 인정해주지 않고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상황. 명확하게 자각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알라나의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든 순간이었을 테다. 알라나는 그렇게 조용히 인 불길을 갖고, 우연히 발견한 공고를 계기로 시장 후보 왝스의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출근하게 된다.
사실 그날 새벽 도로에 의상실이나 미용실 공고가 붙었더라면 알라나는 의상/헤어디자이너 도우미가 되러 갔을 것이고, 은행원이나 전화교환원 모집 공고가 있었으면 그게 되러 갔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알라나에게 필요했던 건 번듯한 역할과 그걸 ‘맡기면 잘 해내’는 자기 능력에 대한 인정뿐이었기 때문이다(개리가 알라나의 능력을 인정해준 유일한 남성이긴 하지만, 개리는 알라나가 자기 곁에서 자기만을 돕는 자기 것일 때만 보상으로 인정을 줬다). 하지만 알라나가 자기의 제대로 된 커리어를 위해 내린 첫 결정인 의원실 출근도 옛 친구 브라이언의 주선을 통한 것인 만큼 근본적 한계를 갖는다.
알라나는 의원실 사람들의 '대의'에 공감하고 그것을 함께 추구하는 것 같다가도, 왝스와 브라이언이 차례로 내리는 칭찬에 기뻐하다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듯 그들에게 여성으로서도 관심받기를 내심 기대한다. 그리고 더 슬픈 것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 여자의 능력에 대한 인정이 곧 성애적 호감의 표시나 다름없고, 그 인정에 대한 여성의 긍정은 곧 섹스의 가능성에 대한 승인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니까. 어쩌면 지금과 달리 다를 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알라나가 하필 시의원 사무실을 고른 것이 어떤 면으로는 예기치 못한 호재가 된다. 시장 후보 왝스(베니 사프디)의 사무실이야말로 그 마을에서 가장 공적인 공간이고, 그래서 온 동네를 주인처럼 누비고 다니는 개리가 마음대로 진입할 수 없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개리는 어떤 자원으로부터 거절당해 본 적이 없고 늘 원하는 즉시 그것을 가져온 십 대 남성이다. 그러나 불 꺼진 의원실, 알라나라는 키가 없는 의원실은 개리의 침입을 불허하고 개리는 엄청난 탈력감을 느끼며 알라나를 영영 잃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개리의 주제넘은 좌절은 예견되어 있었다. 애초에 알라나를 따라 자원봉사를 하러 왔을 때도 개리의 목적은 돕는 게 아니라 알라나 주변의 환경을 점검하고(다시 말해, 알라나에게 호감을 품은 남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마음껏 훼방을 놓으려는 데에 있었다. 개리가 알라나와 멀어진 것도 (관심사의 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다소 우스꽝스러워 보일지언정) 대의가 무엇인지를 따지기 시작한 알라나에게 개리 자신은 마음껏 천민자본주의의 옹호자로 남겠노라고 오기에 찬 억지를 부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싸운 후 개리는 알라나의 화해 시도를 묵살하고 스스로 운전을 해 도망쳤지만, 이전에 경찰차를 따라 달리며 내가 널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약속했던 알라나는 이제 없다. 개리를 한심해하느라 끝까지 쫓아 나오지도 않은 알라나만 남았을 뿐이다.
알라나는 개리의 영향권 밖으로 도망쳐 진짜 어른의 세계로 진입해버리고 말았다. 법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개리에겐 알라나의 세계로 진입해 그를 다시 되찾아오고 자기 옆에 주저앉힐 방법이 더는 없다. 그런데 이렇게 알라나를 영영 잃었다고 생각하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개리의 앞에 실물의 알라나가 기적처럼 다시 나타난다. 왜? 알라나가 다른 ‘진짜 남자’들의 인정, 즉 성애 관계에서의 착취를 ‘당하는’ 데에 실패했으니까.
그보다 조금 앞선 시점, 알라나는 왝스 의원이 자기와 데이트하길 원한다고 생각하고 한발 늦게 플러팅한 브라이언을 후순위로 두면서까지 왝스에게 달려갔는데 도착해 보니 그는 남자친구와 앉아있다. 알라나는 감시의 눈길을 따돌릴 알리바이로 호출됐을 뿐이다. 너무나 철저하게 소외되고 이용당하는 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알라나는 거울 속 모습으로 비치고, 그 상황의 주인공인 두 게이들 - 왝스와 매튜는 정면 숏으로 등장한다. 마치 지금까지의 알라나의 모든 노력과 시도가 다 쓸데없었고 알라나 자체도 여전히 존재감이 희미한 허상에 가깝다는 듯이. 거울에 비친 알라나는 차차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가지만, 끝까지 왝스의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그의 남자친구 매튜를 데려다주다가 오히려 ‘가장 남자답지 않은 성인 남자’ 매튜에게서 뜻밖의 쓸만한 가르침을 듣게 된다. ‘남자들이란 다 똑같이 쓰레기다’라는 교훈을.
그래서 알라나는 어차피 다 똑같은 쓰레기고 어차피 다 자신을 실망시킬 거라면 차라리, 남자가 원하는 바를 그대로 수행했을 때 합당하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되돌려 주기라도 하는 이를 고르자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조건을 충족시키면 보상을 준다. 일을 잘 해내면 '너는 맡기면 잘 해낸다'라고 말해주는 남자를 찾는다. 알라나의 인생에서 그런 남자는 아직 법적 성인도 아닌, 뚱뚱하고 못생긴, 장사꾼보다도 사기꾼에 더 가까운, 여자를 말도 못 하게 밝히는 개리 뿐이었다. 결국 알라나는 자기 앞에 놓인 모든 선택지 중에 가장 괜찮은 대안이 될 법한 개리를 고르고, 그에게 순종해 그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브라이언을 골랐다면 알라나의 미래가 달라졌을까? 브라이언은 물론 알라나의 능력과 의사를 제대로 존중하는 거의 유일한 성인 남성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었으리라고 본다. 브라이언은 너무 점잖고 유보적이고 신중한 진짜 어른이다. 그리고 알라나와 브라이언은 아직 서로의 바닥을 모르는데, 물론 그걸 보고도 브라이언이 알라나를 계속 좋아할 가능성도 있겠지만, 알라나에게는 그 긴 시간과 낮은 가능성에 뭔가를 걸 여유가 더 이상 없다. 알라나는 남자들에게서 - 그러니까 자기 세상으로부터 - 계속 거절만 당해왔는데 개리만이 자기를 노골적으로 욕망했던 과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조급해진 알라나를 만족시킬 남자는 개리 단 하나뿐이다. 개리는 만약 더 이상 동업자로서 함께 할 수 없어진대도, 하다못해 가슴이라도 보여주면 ‘만져도 되냐’고 물어볼 것이 확실한, 알라나를 지속적으로 욕망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런데 사실 알라나에게는 남자들 대신 자매들이라는 대안이 있었다. 큰언니 에스티는 부모님을 도와 부동산 업자로 일하고 있고 작은언니 다니엘은 기타를 친다(실제 자매들이 함께 한 밴드 HAIM의 세 자매가 그대로 주인공 자매들로 캐스팅되었는데, 배역의 이름까지 바꾸지 않은 데에는 PTA의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알라나가 자괴감에 빠질 때마다 덤덤히 조언을 주고, 개리의 어린 동생 그렉에게 나도 기타를 친다고 말하며 공감대를 찾는 다정한 다니엘의 존재감이 특히 두텁다. 다니엘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법적 성인들, 심지어 알라나와 개리의 부모들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사람으로서 극의 불안한 공백들을 메운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알라나도 언니들을 닮아 적절한 사업상의 판단력과 대중예술에의 재능과 열정과 선의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미 증명해냈다.
그런데 알라나가 꿈꿀 수 있는 것은 여전히 그 분야의 상급자(라고 믿어지는) 남성들의 이목을 끌어 그의 권위로 말미암아 자신의 불안한 지위를 튼튼히 고정하는 받침대 삼는 일뿐이다. 결국 이 영화의 핵심은 누군가의 여자친구가 될지언정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고 싶은 알라나의 처절한 인정 투쟁이다. 알라나가 가진 모든 자원 - 능력, 가족 - 마저 그것을 증명할 창구가 ‘재능을 알아봐 주는 남자’뿐이라는 사실 앞에서 쓰레기가 되고 만다.
그래서 알라나는 다시 만난 개리의 손을 잡고 뛰며 ‘사랑해, 개리’라고 중얼거린다. 그러니까 그건 엄밀히 말해 사랑 고백이 아니었다. 알라나 인생의 자유의지의 종언과도 같은 선언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줄곧 성인 남성들의 공간을 빌려야만 했던 남자아이가 이제 진짜 자기만의 자원을 가진 남자가 되어 잃어버릴 뻔했던 여자를 되찾는 전통적 서사에 충실한 마무리를 짓는다. 새로 개업한 핀볼 게임 가게로 돌아간 개리 발렌타인이 의기양양하게 알라나 케인을 소개하며 외친 말: "미세스 알라나 발렌타인을 소개합니다." 개리는 자신에게 실패를 안긴 텔오더콕 바나 마지막 연극 무대, 존 피터스의 집, 물침대 사업의 잔해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새 아지트를 구축하고 알라나를 그곳으로 다시 꾀어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리코리쉬 피자>의 제목은 70년대 산 페르난도 밸리 골목에 있었던 LP 바의 상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감독이 특정한 시대에 대한 특정한 정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분명하니, 이제 다른 걸 물어야 할 때다: ‘어떤’ 시대에 대한 ‘어떤’ 정서인가?
재능 있고 감각 있는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그 재능의 편취, 부당한 대우와 성적 착취가 당연하던 시대. 영화 제작사들의 지국이 모인 할리우드 끝자락이라 포르노그래피 제작의 성지가 되어 버린 좁은 동네*에서 주민들이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입소문이 빨리 돌고, 여자에게 특히 가혹한 평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던 시대. 디나이얼 게이, 드라마틱하고 오버스러운 게이, 동양인에 대한 조롱이 잘 먹히는 유머 코드로 소비되던 시대. 그러나 남자는 착하거나 (협잡꾼의 능력일지라도) 능력이 있거나 젊기만 하면 마땅한 ‘보상’을 얻었던 시대.
그런 시대에 대한 통렬한 비판일까? 오직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주목받고 쉽게 성공한 PTA의 일말의 참회였을까?
만약 PTA가 영화를 통해 나름의 자성을 시도한 것이 맞다면, <펀치 드렁크 러브>보다는 여성 시점의 숏이 많았다는 점도 21세기 PTA의 의식화를 염두에 두고 돌아보아야 한다. 확실히 2002년보다 2022년의 PTA 영화는 (알라나가 등장한 첫 장면처럼)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 대신,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의 시선을 의식한' 여성의 시선에서 전개되는 장면들의 비중이 훨씬 커졌다.
그러나 여전히 관객을 헷갈리게 하는 지점들이 있다. 예를 들면 개리가 물침대에서 같이 누운 알라나의 가슴을 몰래 만지지 않은 것만으로 성장과 선의의 가능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처럼 연출한 씬. 또 개리와 어머니의 친구인 제리(존 마이클 히긴스)가 운영하는 일본풍 식당도 묘한 소재다. 늙은 백인 남성 제리의 부인은 극중 '미오코'에서 '키미코'로 한 번 바뀌지만,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일본인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와중에 개리는 둘을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 옐로 피버 제리는 미오코와 키미코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들에게 어처구니없는 브로큰 잉글리시 억양으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데, 그 장면을 표면 그대로 수용하자면 어린 동양인 여성으로서 느끼는 당혹감과 불쾌함보다 헛웃음이 먼저 터져 나올 정도로 수준이 낮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인 인종차별이라 오히려 지성인끼리 합의된 블랙 유머처럼 받아들여지는 이 씬이 두 번이나 반복된다.
이 PTA 식의 '유머'를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옳을까. 어쩌면 그는 정말로 개리의 못난 면을, 알라나의 좁은 시야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작업 그 자체에만 집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개리 외의 다른 남성 인물 - 제리, 랜스, 잭 홀든과 렉스, 존 피터스, 왝스 등 - 을 그려낸 방식을 보라. PTA는 개리의 심리적 라이벌이고 꺾어야 할 벽이었던 성인 남성들의 찌질함을 까발리고 그들의 남성성과 자의식 과잉을 최대한 희화화하는 데에 영화의 거의 반절을 할애했다. 만약 그 희화화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그는 결국 실패한 소년이 성공한 성인 남자가 되어 사랑하는 여자를 보상으로 얻는 그 시절의 서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저 그런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어쩌면 개리의 라이벌을 '치우기' 위함이 아니라, 개리 역시 성공한 성인 남자가 되어 그 우스꽝스러운 남자들의 반열에 합류하게 될 것임을 예언하기 위한 작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 우스꽝스럽고 별 볼일 없는 남자에게 재능 있는 여자가 사냥당하고 창창한 미래를 포기하게 되는지까지도.
차라리 그가 <리코리쉬 피자>를 만들며 그 시대 혹은 할리우드의 젠더 정치성에 대한 비판을 의도한 게 아니라면 좋겠다. 그는 그냥 해학적 포착에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진가'에 가까운 편이 나았을 지도. 이런 고차원의 유머러스한 성찰을 시도했고, 심지어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는 점이 그를 한층 더 얄미워하게 만든다. 남자에게는 젊고 무지할 때 마음껏 약자를 차별하고 도의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흥청망청 살다가도, 나이 들면 그걸 성숙한 태도로 돌아보고 만회할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어쩌면 이 영화를 만든 건 PTA가 아니라 그의 파트너 마야 루돌프였어야 할지도 모른다.
* 미국의 포르노 산업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LA)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산페르난도 밸리다. 할리우드 북쪽에 위치한 이곳은 1940년대 LA 지역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의 베드타운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또한 CBS의 스튜디오, NBC 유니버설, 월트디즈니, 워너브라더스의 지국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는 1970년대부터 포르노 영화를 제작하면서 인근의 실리콘밸리를 본떠서 폰밸리(Porn Valley)라고 불리기도 한다.
산페르난도 밸리에 거주하는 인구는 177만 명으로 상당수가 LA 지역에 있는 직장을 다닌다. 하지만 이곳에 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1970년대에 제작된 <부기 나이트(Boogie Nights)> 등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제작되는 포르노 영화의 90%가 이곳에서 나온다. … 약 2000~3000명이 이러한 포르노 제작 산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곳에 가면 포르노 배우로 성공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많은 젊은 여성들이 포르노 스타를 꿈꾸면서 이곳을 찾기도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영화, 동영상, 그리고 포르노그래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