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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n 09. 2022

<소설가의 영화>와 <우연과 상상>,
붙들린 진실

편안하다 편안하지 않다


진심만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선 안 된다는 것도 알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험에 빠트릴 지도 모르는 그 진심에만 충실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를 금방 불편하게 만들고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또 후회하게 만들 진심. 그 진심에 충실한 동안은 일종의 자포자기적 용기 같은 게 솟아나서, 이걸 말하는 동안은 난 안전할 것 같고, 지금 내 앞에서 내 말을 들으면서 당황스러움에 압도당한 이 사람의 표정이 영원했으면 좋겠고, 더럽고 때늦었고 집요한 미움이나 사랑이 이 온 세상에 다 까발려지더라도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 정도로 내겐 그걸 말하는 일이 중요하니까. 그 순간에는 그것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일 것만 같으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든다. 이 절대적일 것 같은 진심도 결국 순간의 진실일 뿐이라면?



<소설가의 영화>를 보면서 그 '필연적으로 순간적인' 진심에 대해 생각했는데, <우연과 상상> 역시 '상상하는 그 순간만큼은 진실'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 세 편이었다.


<소설가의 영화>는 진심이지만 무의미한 찬사와 존경으로 시작해, 진심이지만 후회할 게 뻔한 분노로 추동되다가, 너무 진심이라서 더 슬픈 푸티지로 마감되는 영화다. 왜 연기를 하지 않냐고, 왜 글을 안 쓰냐고, 내가 얘기를 만들어주겠다고 엄청나게 무례하게 선을 훅 넘어오는 사람들. 나이와 상하관계에 따라 (시인 - 준희 - 후배 - 길수) 달라지는 태도들. 얼핏 보아선 효진과 양주로 대표되는 사람들의 무신경함에 지친 자의 비난을 담은 것도 같지만, 효진과 양주 역시 최선을 다해 대화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감독의 의도가 비난인지는 불분명해진다. 말하자면 홍상수는 입에 발린 말밖에 못하는 사람들의 최선을 조롱하되 그들의 속마음까지 의심하진 않는다.


게다가 영화에서 여러 번 말해졌듯 '카리스마' 있게 남들의 무례를 지적하고, 예상 불가능하고, 그래서 가장 진심을 말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준희조차 완전무결하지 않다. "저 정말로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계속 말하는 현우(박미소)의 대상이 달라진 존경을 목격한 순간 소설가 준희는 참지 못하고 픽 웃고 만다. 또다른 말들이 남발되는 씬에서, 준희는 효진과 양주의 충고에 얻어맞는 듯한 길수의 보호자나 대변인처럼 행동하지만, 실상은 정작 길수가 방관자처럼 지켜보다가 가볍게 날려보낼 수 있는 말들에 괜히 준희만 상처받아 울컥한 것에 더 가깝다. 분명 어떤 순간에는 준희도 효진, 양주, 현우나 세원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도 무례하고 그도 무신경하다. 과거의 실수를, 현재의 미숙함을 숨기기 위해 진심을 말하지 않으려다 결국 실패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아무리 하찮은 악인일지라도) 선악을 구분하는 유치한 의식은 사라지고, 홍상수 영화가 지금껏 축적해온 흐름의 궤적을 다시금 매만지는 대화들만 남는다. 홍상수의 인물이라는 건 결국 홍상수 자신을 다 다른 크기로 조각내어 그 조각에 살을 붙인 것처럼 창조된 인물들이기에.



종반부의 '영화 속 영화', 참 어설프고 튀지만 그럼에도 슬프고 따뜻한 푸티지를 보면서는 기어이 제작 의도와 우리가 아는 현실을 엮어보려는 얕은 해석의 유혹에 빠지고야 만다. 홍 감독이 이 영화에 어린 연인에 대한 애틋한 안타까움이나 언젠가 찾아올 이별을 준비하는 (드디어 성숙한) 어른의 미안함을 담은 건 아닐까 싶은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양주의 자기소개, '처'라는 정정, '30년을 같이 산 배우자'라는 설명 등등에 김민희가 연기한 길수가 그토록 예민하게 걸려 넘어지고 마는 장면마다 (아직 이혼하지 않은 법적 부인에게 이렇게까지 무례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분명히 홍상수의 어떠한 의도가 번뜩이고는 있다. 악마적이기엔 너무 하찮고, 재치라기엔 너무 못된 의도가.

하지만 현실의 하고많은 윤리적 잣대를 충분히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이 영화의 엔딩크레딧 이후 단 2분. 그 2분이 가장 아름답고 마음에 남는 장면이라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준희의 영화를 홀로 보고 나와선 아무도 자길 기다리지 않고 있는 걸 확인한 길수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과, 옥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탄 길수를 굳이 따라가지 않는 카메라 말이다. 잠깐의 외롭고 쓸쓸한 표정을 지워내고 씩씩하게 사람들을 찾아가는 길수의 ‘나아갈 길’ 대신 ‘남은 자리’를 조망하는 것. 이 순간의 정서를 굳이 상투적으로 표현하자면 희망찬 슬픔의 역설 정도일까. 혹은 카메라 속/앞의 사람이 사라지고 카메라 바깥/뒤의 사람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기계적으로 영화적인 순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마구치의 언어로 대신 한다면, “방금 뭔가 일어났어”(<드라이브 마이 카>)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한편 영화를 만드는 일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두 작품은 영화적 진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탐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제목부터 소설가의 '영화'인 작품뿐 아니라 이야기성 그 자체에만 충실한 듯한 <우연과 상상>도 마찬가지로 메타-영화적 속성을 갖는다.


기성 배우가 아닌 워크샵에서 차출한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하고, 플롯의 탄탄한 껍질을 지키되 그 안에서 배우들 간 상호작용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애드립 즉 '우연'도 유연하게 허용한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연출 기법은 "배우가 가장 편안한 상태에 있을 때 그에게서 나온 모든 것을 온전히 담고 싶"다던 준희의 영화론과 상통한다. 준희가 표상하는 홍상수의 영화적 태도 역시 '즉흥성'이란 마력을 선호하는 것에 가깝다. 홍상수는 잘 알려졌다시피 촬영 당일 혹은 전일에 로케이션을 방문해 그 순간 느낀 정념을 바탕으로 구성한 쪽대본을 기반으로 촬영하는 신기한 연출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의 배우 활용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배우들에게 거의 무한의 자율성을 허락하는 하마구치와 달리 홍상수는 매우 타이트하게, 자신이 짜놓은 대사/시선/표정/동선을 그대로 처리해주길 요청한다고 한다. 배우가 그 순간 느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유연기는 (놀랍게도) 홍상수 영화에서는 거의 배제된 요소인 것이다.


의외의 철저함을 발휘하지만 홍상수가 결국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그 철저하게 잘 짜인 플롯을 따라 촬영하는 그 '순간' 진실이 되는 상황이다. "내가 실제로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는데 항상 과장하고 있는 것 같아서" 소설을 더이상 쓰지 못하겠다던 준희가 영화로 눈을 돌렸다는 설정은, '영화란 무엇인가'란 오래된 질문에 대한 홍 감독 나름의 궁극적인 답변이기도 하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영화만 할 수 있는 일. 그것은 곧 1) 순간의 진실을 2) 시간을 들여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는 3) 스크린 안에 붙잡아두는 것. 배우와 서사와 연출이 교차하는 그 촬영의 순간만큼은 진실이었던 어떤 것의 재현을 의도한, 그러나 결국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이지 사실이 될 수는 없는, 그런 모순적인 이야기에 도달하기. 홍상수 영화란 그런 “다큐멘터리가 아니지만, 모든 것이 진짜인” 이야기의 흐름의 집합이며, 그 흐름을 따르다 보니 ‘우연히 당도한’ 목적지 같은 영화다.



<우연과 상상>의 메타영화적 속성은 하마구치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하고 또 상황에 얹혀 흘러가게 놔둔(이 부분이 창조보다 더 중요할 것 같기도 하다) 대사를 매개로 드러난다. 물론 모든 영화는 대사를 매개로 특정한 의도나 소재를 은유하고자 한다. 하지만 <우연과 상상>은 ‘의도를 담아 만들어진 대사’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만들어졌는데 우연히 어떤 상황의 의도를 갖게 된 표현들’을 대사라고 부른다는 점에서 특이하고 특별한 영화다.


하마구치는 가히 대사의 귀재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엄청난 양, 놀라운 흡인력의 대사를 자랑한다. 핑퐁핑퐁 빠르고 정확하게 오가며 쾌감을 불러일으키던 대사들은 어느 순간 침묵하며 정서적 공백을 창조하기도 하고(<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 예상치 못한 진심과 더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인물을 데려다놓기도 하고(<문은 열어둔 채로>), 계속해서 삐그덕대다가 당황스러운 오해에 가닿기도 한다(<다시 한 번>). 너무 많은 대사는 영화를 빈 칸 없이 채우며, 무엇이든 될 수 있고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한다. 이렇게 벌려진 틈을 보는 관객은 그 자리에 무엇이든 대입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많은 말들의 존재/부재는 보는 이를 어디로 어떻게 이끌어 가는가.


1.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종반부, 운명의 장난에 처한 세 남녀가 드디어 대면한 씬에서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는 갑작스럽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친구 츠구미(현리)와 전 연인 카즈아키(나카지마 아유무)를 차례로 잃어버린다. 바로 그 다음 숏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마치 홍상수의 클로즈업마냥) 어설프게 덜컹거리며 메이코와 관객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다. 다시 줌아웃, 세 남녀가 다시 평화로이 앉아있다. 바로 전에 지나간 모든 일이 메이코의 상상이었음을 밝히는 귀엽고 우스운 연출이지만, 그 상상은 그 순간만큼은 관객을 놀라게 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첫번째 결말(메이코가 마음을 털어놓고 울음을 터트린다)과 두번째 결말(메이코가 운명에 승복하고 츠-카 커플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며 걸어나간다) 중 어떤 것이 진짜로 일어난 일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메이코가 홀로 도쿄 시내를 걷다가 갑자기 멈춰서 자기 눈 앞의 흔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 그럼으로써 그것을 어떤 ‘광경’ 혹은 ‘정경’으로 만들 때의 고요만이 ‘진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2. <문은 열어둔 채로>와 <다시 한 번>은 보다 분명하게 영화적 진실이란 주제의식을 가리킨다. 각 결말은 작은 실수로 인한 큰 불행 / 작은 실수로 인해 얻은 새 희망으로 명확히 갈리지만 말이다.

<문은 열어둔 채로>에서는 총 세 번 문이 열린다. 가장 먼저 나오(모리 카츠키)의 낭독이 촉발한 세가와 교수(시부카와 키요히코)의 반응은 두 인물이 예상치 못하게 진실된 대화를 나누도록 유도한다. 비록 그 낭독부터가 ‘나는 이것보다 더 나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상상한 사사키(카이 쇼우마)의 열패감에서 비롯된 (거짓된) 것이기는 하나, 진실을 숨기고 시작된 대화가 ‘문은 열어둔 채로’ - 즉 우연의 가능성을 방지하려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것을 초대하기 위해 활짝 열린 채로 - 진행되는 동안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나오와 세가와가 ‘그 순간만큼은 진실인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인생에 다시 없을 우연이 불러온 소중한 순간은 나오가 집으로 돌아간 이후, 다시 문이 열리고 남편과 딸이 들어오는 순간 역시 우연하게도 처참하고 어이없는 종말을 맞게 된다.

그러나 하마구치는 이야기가 불행에서 끝나도록 두지 않고 5년 후의 우연적 상황을 다시 삽입해 일종의 극복을 이룩한다. 실수는 자기 탓이라지만, 어이없는 음모를 꾸미도록 청탁을 했던 근본적 원인인 사사키를 우연히 마주친 나오가 그에게 화해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세가와는 글을 쓰고, 너는 편집을 하고, 나는 교열을 보자는 나오의 중얼거림을 사사키는 단칼에 거절하고 만다.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사사키가 5년 전의 그와 똑같은 사람임을 확인한 나오는 버스에서 내리기 전 결혼을 앞둔 사사키에게 일부러 마음에도 없는 키스를 해 그를 당황시킨다. 여전히, (버스) 문은 열어둔 채로.


3. <다시 한 번>은 낭독보다 더욱 노골적인 장치인 역할극을 통해 ‘그 순간에는 진실인 것’을 창조해낸다. 과거의 소중한 사람을 잃고 내내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살아온 나츠코(우라베 후사코)와 아야(카와이 아오바)는 생판 남인 서로를 그 소중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기왕 그렇게 착각한 거, 제대로 기억날 때까지 서로가 그 사람인 척 연기해보자는 이 괴상한 공모가 결국 소실되었던 아야의 기억 일부를 되살리면서 영화는 나름의 희망찬 결말을 맞는다(아야가 기억해낸 노조미라는 이름이 일어로 ‘희망’을 뜻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결국 하마구치의 세 단편 연작은 서사적으로 일관되게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진실된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홍상수 영화와 본질적으로 같다. 똑같은 플롯과 똑같은 배우들로 똑같은 상황을 다시 똑같이 연출하려고 해도 불러올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그 믿음. 그 진실된 무엇, 훼손되지 않으면서 일시적인 무엇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화면 안에 붙들기’ 하는 게 영화의 본질이라는 믿음.


감독들의 믿음에는 관객으로서 존경을 표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 ‘붙들린’ 진실이 정말로 진실됐다고 쳐도, 그것 역시 결국엔 ‘이야기’ 아닌가. 포착될 수 있을 뿐 재현될 수는 없기 때문에 -> 유일무이하고 -> 그래서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논리의 전개가 어딘지 모자라지 않은가 하는 의문 말이다. 결국은 현실이 아니라 픽션인 ‘순간의 진실’들. 너무도 정확하고 아름답게 현실적이라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대사들에서,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감독들 나름의 함의를 감지하는 순간 나는 어딘지 편안하지 않아진다.



+) 덧: <우연과 상상>은 여러 부분에서 하마구치의 전작들과 중첩되는 영화다. 차를 타고 길게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드마카>를, 얄궃게 엮이는 삼각관계나 타인을 지인으로 잘못 알아본다는 아이디어에서는 <아사코>를, 긴 소설의 낭독을 그대로 싣는 과감함에서는 <해피아워>를 떠올리게 한다. 단숨에 젊은 거장 타이틀을 획득하고 일본영화 뉴웨이브 선봉의 자리에 오른 하마구치도 어쩌면, 홍상수처럼 자기 영화의 축적을 통해 어떤 에너지의 흐름을 만드려는 건 아닐까 지켜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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