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해 Jun 19. 2022

<버닝>, <박하사탕> 그리고 <택시 드라이버>

왜 어떤 마초는 불쾌하고 다른 마초는 불쾌하지 않은가


앞으로도 누군가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집과 차에 불을 지를 것이다
- 정한아, PMS



최근에 한 영화 평론가의 수업을 두 번째 듣고 있는데(글 완성을 미뤄두는 동안 이미 종강했지만) 그분이 매번 빼놓지 않고 말씀하신 게 있다.


"영화는 인연이다. 어떻게, 어떤 방법과 순서로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대화를 시작한다."


수업에서도 자주 듣고 그 선생님의 글에서도 보고, 나 역시도 나의 지난 영화사를 톺아보며 공감하는 이 말을 5월에 연달아 본 영화들에서 다시 느끼고 있다.

수업 과제로 본 <버닝>,

직후 이창동을 더 이해하고 싶어서 본 <박하사탕>,

그리고 넷플릭스 스트리밍 기간이 끝나간다길래 정말 우연히 보게 된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

이 세 편의 마초이즘에서 4월에 보았던 기타노 타케시와 폴 토마스 앤더슨 두 감독이 묘사하는 남성성까지 연이어 떠오른다고 해도 내겐 무리한 연결이 아니다.

소제에서는 어떤 '마초'라고 칭했지만, 실은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와 이창동의 세계관 속 주인공 남성들을 분류하자면 전형적인 마초 남성이라기보단 마초 남성을 동경하는 인셀에 더 가까울 듯하다. 그들은 원래 자기 것이 아니고 영영 가질 수도 없는 것을 갈망하고, '잃어버렸다'고 착각하고, 망상하고, 그 허구의 상실을 메꾸기 위해 수시로 자기와 타인을 해한다. 그러니 제목은 어쩌면 이렇게 바꿔야 할지도. 왜 어떤 (남성의) 폭력은 괜찮고, 다른 폭력은 불쾌한가.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와 <버닝>의 종수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부여받고, 그렇게 심어진 갈망을 자기 것처럼 소화하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게 되는 인물이다. 자본주의적 충동의 수동적 행위자처럼 묘사되는 남성들. 이때 감독이 이들에게 '피해자성'을 덧입히느냐 아니냐가 불쾌감의 척도가 되고, 트래비스와 종수를 <박하사탕>의 영호와 나누는 경계선이 된다.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퇴역 군인 트래비스의 망상적 자아상은 영화 후반부에 그가 부모에게 쓴 편지 혹은 대선 주자의 비밀 경호원이라는 허황된 꿈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여자친구도 있어요"라던 그의 현실은 사실 이렇다: 부족한 교양 때문에 대선 캠프에서 일하는 고학력 여성 벳시에게 차이고, 벳시 대신 찾아낸 새로운 삶의 목적 - 그루밍당하는 어린 창녀 아이리스의 구원자가 되기를 '얼떨결에' 갈망하게 되는 무목적, 무방향의 운전수.


종수 역시 해결되지 않는 결핍 - 자본의 결핍, 부성의 결핍, 희망의 결핍과 탈주로의 결핍 -에 둘러싸여 체념적인 태도로 살아가다가 갑자기 자신이 질투하고 갈망할 명확한 대상을 '얼떨결에' 획득한다. 종수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선명히 기억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해미가 아니라, 해미를 사랑하게 되자마자(정확히는 해미와 섹스하게 되자마자) 너무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한 벤이 그 대상이다.



벤은 강남의 화려한 아파트에 혼자 살며 해미 같은 노동계급 여성(의 이야기들)을 수집하고, 자기 자신을 일컬어 "우수한 DNA"를 가졌기에 병에 걸리지도 다치지도 않는다고 농담하고, 경비원에게 "시골 잘 다녀오셨어요?"라고 상냥하게 묻는 여유를 발휘하는 잘생기고 돈 많고 젊은 남자다. 반면 종수는 바로 그 "시골"에 살며 수감된 아버지의 뒤치다꺼리를 맡는 더 젊은 남자다. 우연히 조우한 카페에서도, 해미의 실종 후 벤을 추적하던 경로 중에도 종수는 항상 높은 곳에 있는 벤을 올려다보기 위해 한껏 고개를 꺾는다. 벤을 종수가 미워하게 되지 아니 할리 없다.


종수의 질투는 "사라지고 싶다"라고 몇 번이고 말한, 즉 자신의 비존재를 바라는 해미의 갈망을 근거 삼아 해미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둔갑한다. 종수의 상상 속에서 벤은 그 우려를 먹고 무럭무럭 푸른 수염을 길러간다. 한편 벤이 들려준 "자연의 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종수의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종수는 어린 시절 도망간 엄마의 옷이 아니라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꿈을 꾼다. 이 남성 인물들은 일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의 (해미-종수의 것보다 훨씬 완전에 가까운) 교감을 나눈다. 그들은 서로를 먹이고 키운다. 결말에선 결국 종수의 벤에 대한 열등감이 해미에 의한 복수심을 능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해미가 추동한 야릇하고 다정한 감정 따위보다 벤을 향한 갈망이 훨씬 지독하고 깊은 것이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난 재미만 있으면 뭐든 해"라며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를 드러냈던 벤은 사실 갈망할 대상의 부재로 인해 더 큰 결핍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벤 자신도 이를 깨닫지 못했지만, 사실 '진짜로' 사라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해미가 아니라 벤이다. 사회학자 김홍중의 말을 빌려오자면 - (…) 해미에게 존재한다는 것은 없다는 것과 대립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벤에게 그것은 다소의 문제, 많아짐과 적어짐의 문제다. 벤은 존재를 축적해나간다. 부재도 축적해나간다.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더욱 없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벤의 욕망은 무의 끝을 향해 있다. "뼛속까지 울리는 베이스"의 더 많은 축적을 향한다. 이런 점에서, 벤은 식인증/우울증적이며, 수집가적이며,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에는 무제한적 축적 충동이 존재한다. 사회 시스템이기 이전에 자본주의는 마음의 시스템이며, 그 강박적 운동은 무한성을 향한다. 자본주의의 원형적 주체는 기업가가 아니라 사제, 연구자, 그리고 예술가다. 도달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에 대한 욕망을 동력으로 삶을 이끄는 자들. (- 김홍중, <은둔기계>)


해미의 실종이란 메타포가 탈-자본주의적인 성격을 띤다고, 혹은 해미가 자본(과 자신이 그에 빚진 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도망치고 싶어한다고 해석한다면, 종수는 해미보단 벤을 닮은 인물이다. 벤을 닮았으나 벤이 될 수 없는 종수의 결핍감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은 자본의 결핍 때문에 야기된다. 보통 자본은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있을 수도 있었는데 제때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잃은 것'으로서 상실감을 야기한다. 종수가 살고 있는 파주의 낡은 농가는 그냥 자연스레 존재하는 집이 아니며,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종수의 아버지가 젊은 시절 중동에 다녀온 돈으로 강남의 아파트를 '사두지 않았기 때문에' 살게 된 대체적 공간이다. 파주 집은 종수와 아버지에게 게으름(=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원죄)의 상징이고 그들이 '상실한' 번듯함 대신 얻은 부박함이다. 그 집은 그 자체로 종수 부자의 결핍과 부재 - 갖지 못함, 행동하지 못함, 갈 방향을 모름 -를 표상한다.


모호하게 존재하는 여러 상징들 속에서 완전하게 종수의 손에 잡히며 명백하게 그의 소유물인 단 두 가지가 바로 그 파주 집과 아버지의 낡은 트럭이다. 트럭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존심과 가난과 결핍을 상징하고 그래서 종수는 벤을 미행할 때조차 그 눈에 띄는 트럭을 포기하지 못한다. 엔딩씬에서도 종수, 해미, 벤 세 사람이 처음 만난 공항에서 종수의 트럭을 타고 오던 때와 같은 구도로, 같은 차창에 같은 불빛이 비친다. 그때의 노을 같은 불길을 뒤로하고 종수는 트럭을 운전해 현장을 빠져나오지만, 알몸인 그가 나아갈 곳을 제시하지 않은 채로 이야기는 끝을 맞는다.


​​


종전 후 방향을 잃은 트래비스 역시 종수와 같은 부류의 운전수다. 흑인 창녀와 그 손님이 탄 자리를 물로 씻어내고, 400구경 매그넘으로 부정한 아내를 쏘겠다는 부자 손님의 폭력적 분노에 매료되는 트래비스는 삶의 목적이 꼭 있어야 한다고 믿는데 그 자리에 들어찰 것을 갖지 못해 방황하는 부류. 트래비스는 말할 때마다 "난 00는 잘 모르지만"이라는 사족을 붙이고, 누군가 자신에게 뭔가를 물으면 "나 말이야?" "나한테 말하는 거야?"라고 되묻는다. 그는 갑작스레 호명당할 때, 즉 사회가 자신을 바라볼 때 당황하는 인물이다. 정치도 영화도 음악도 잘 모르고 살아가는데 사회는 자꾸 예고 없이 그에게 묻는다. 좋아하는 영화가 있냐고. 혹은 음악가가 있냐고. 어떤 정치적 현안을 문제적이라고 느끼냐고. 그럴 때 그는 또 말한다. "돈 쓸 데가 없어서요."라고. 그러나 사실 그는 삶의 목적이 없고 취향과 교양이 없어서 돈 쓸 데가 없는 게 아니라, '돈 쓸 데'를 못 찾아서 삶의 목적이 없는 것에 더 가깝다. 이 역시 전후 자본주의의 욕망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소화하지 못한 평범한 인간 군상의 모습.


제대로 봐주지도, 뭔가를 알게 해주지도(끼워주거나 가르쳐주거나) 않으면서 그가 시선에 걸릴 때마다 관심 있는 척 질문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는 일종의 수치와 무력감을 느낀다. 자신을 뺀 모두가 '차갑고 냉담'하다고 여기면서 미워하게 된다. 그런 트래비스는 팰퍼타인 대선 캠프의 톰이라는 남성이 '봐주지 않는' 벳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그녀를 원한다. 정확히는 그녀가 자신을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봐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 삶의 당연한 한 부분이자 열심히 소비하는 유일한 것인 에로 영화를 벳시가 천박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겨 거부하고 떠나버리자, 벳시 역시 차갑고 냉담한 사회의 일부분이라고 재평가한다.


삶의 목적을 찾는 트래비스의 탐구는 사실 강박적인 데다 허구적이다. 목적의 없음에 슬퍼하기에 앞서 목적이 '왜' 있어야 하는지도 사유해보지 않았고 자기가 목적이라고 정한 것의 타당성도 별로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얄팍하다. 트래비스가 믿는 자아상의 과잉된 선량함만큼이나, 목적의 과잉된 부재가 그를 망쳐놓는다. 어쨌든 결말에서 일이 잘 풀리는 바람에 트래비스는 자살하지 않고 도시의 영웅이 된다. 영웅이 되고자 할 때는 테러범처럼 거리에서 쫓기고, 사회의 쓰레기들과 뒹굴며 그들을 '처단'하고 나니 드디어 영웅이 되는 아이러니. 그에 대한 숭배는 그간 그를 '제대로 봐주지 않은' 사람들의 적절한 오해 덕분이라는 점에서 더욱 우스워진다. 자기 택시를 일부러 찾아와 뭔가를 말하고 싶어 하는 벳시를 트래비스는 그저 목적지에 내려주고 두고 간다. 당연하다. 이제 사회 전체가 트래비스를 그가 원하는 모습대로 봐주었고, 그래서 벳시라는 특별한 한 사람의 응시는 전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이창동의 종수가 40년 전 스콜세지의 트래비스를 닮았고, 각 감독의 자기 인물을 향하는 시선을 뜯어봤을 때 연민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 같고, 오히려 그들과 그들을 방치해둔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조롱과 체념이 묻어 나온다면, 그래서 그 남성 인물들의 폭력성이 불편하지 않다면. 이창동의 <박하사탕>이 그려낸 영호는 2022년의 시점을 감안하더라도 놀라우리만큼 뒤떨어지고 자기연민적이다. 영호는 이창동이 20년 후 창조한 종수보다도 오히려 PTA의 주인공들이 공통적으로 나타내는 자기파괴적 남성성을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펀치 드렁크 러브>의 배리, <마스터>의 프레디, 그리고 영호는 갈망할 대상을 외부의 정상성(종수의 벤 / 트래비스의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여자친구도 있"는 비밀 요원)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과거에서 찾는 사람들이다. 누군가 자신을 괴롭히거나, 전쟁 혹은 이념에 의한 일방적 학살로 인해 영혼이 파괴되거나, 아무튼 자신에겐 죄가 없고 자기 외부의 무언가가 자기를 망가트렸기 때문에 과거의 진실되고 순수한 나를 되찾고 싶어 하는 남성들.


물론 견디기 힘들 만큼 어려운 사건을 겪어왔기 때문에 나는 병자고 피해자고 약자라는 그들의 주장도 일리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지금 내보이는 중인 폭력성이 문제가 된다. 동일한 시대적 폭력을 겪은 사람들, 특히 주인공보다 더 약자인 사람들이 그 남성들처럼 행동하는가. 남을 때려죽이고 고문하고 여자를 사고 불륜한 배우자를 패고 모든 책임으로부터 도망치면서 되는대로 살다가 도저히 자기를 내버릴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해서야 처절한 척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는가.


나는 영호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 그런데 감독은 그를 어느 정도 불쌍하게 본다. 이 애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사연이 있었다고 남들에게 행한 폭력도 결국 자기가 선험했거나 앞으로 겪게 될 것이라서 그런 거니 용서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폭력의 상처로 생긴 공허가 그를 미치게 하고 쾌락을 추구하게 하고 그로써 타인에 대한 폭력을 추동했다고 설명하려는 것 같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으니, 영호의 죄의식을 똑같이 죄지을 수 있는 인간인 당신도 이해해 보라고 넌지시 들이미는 것 같다.

이창동이 자기 인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라며 직접 부인한 것도 알고 있고, 그가 영호를 마냥 착하고 불쌍한 인물로 그리려는 멍청한 감독도 아닌 것을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비판보다 큰 옹호와 연민의 비중을 감지할 때. 그리고 그 연민을 위해 더 약한 (주로 여성인) 인물들이 성녀/창녀의 고루한 구도 하에서 상투적으로 소비될 때. 그런 장면마다 스콜세지에의 경탄과는 정반대의 감정을 느낀다.


그럼에도 이창동의 탁월함을 굳이 찾아보자면 2000년의 <박하사탕>에서 이토록 뚜렷하게 느껴졌던 단점이 2018년의 <버닝>에서는 일면 개선되었다는 그 '발전'에 있을 것이다. 해미가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는 영화의 후반부 1/3에서 오히려 등장할 때보다 더 파괴적인 존재감을 갖는다고 한 평을 여럿 보았고 그 표면적 의미에는 적극 동의한다. 해미뿐 아니라 이 영화의 여러 장치가 '부재함으로써 존재'라는 오래된 문학적 수사를 위해 존재한다. 상상 속의 고양이인지 진짜 살아있는지 모를 (종수는 벤의 범죄의 증거라고 여긴) 보일이도, 받고 나면 말이 없는 전화도, 해미의 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거짓인 줄 알았더니 도망갔던 엄마만은 기억하는 우물도. 해미의 마임도, 모든 일의 시작인 해미의 아프리카 여행마저도. 이창동 감독은 해미를 그중에서도 가장 힘 있고 불가사의하고 순수한 것, 그래서 두려운 것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자기를 구경거리 삼고 각자의 욕망을 투사해 멋대로 오인하던 남성들을 압도하고, 그들의 무의식까지 지배하는 마녀 같은 존재.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해미는 분명 실종 전보다 실종 후에 더 미스테리하고, 그 속을 더욱 알 수 없고, 때때로 화면 위에 노니는 벤과 종수를 초라하고 무력한 개미 같은 존재로 보이게 할 만큼 전능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남는다. 왜 해미는 사라져 미스테리가 된 후에야 의미를 갖는가. 그러니까 왜 해미는, 눈에 보이는 존재였을 때는 그만큼 강렬하지 못했는가. 사라진 해미를, 종수의 무력과 벤의 권태와 대비되는 강렬한 힘으로 활용하기 위해, 사라지기 전의 해미를 멋대로 내버려 둔 이창동의 선택은 2000년의 연출에서 그다지 많이 나아오지 못한 것 같다.


얼핏 보아 해미는 <박하사탕>의 여러 여자들, 순임과 홍자와 미스리와 경아만큼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의 서사를 삭제당하지는 않는다. 아니 물론 그는 종수의 ‘각성’을 위한 도구지만 동시에 종수를 이야기를 듣는 자로 만드는 이야기꾼이다. 그에게도 열망이 있고 실천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스크린 위에 살아있을 시점에 해미의 이야기는 벤의 이야기의 반만큼도 종수를 매료시키지 못한다. 해미는 극 초반부터 다분히 힘준 말투로 great hunger와 little hunger를 이야기하고, 그것이 그의 도덕적 사유의 근간이며 그가 꽤나 진지하게 그 세계관의 정신적 가치를 따르고자 한다는 것까지는 충분히 주지된다. 하지만 그런 세계관은 이후 영화의 내용과도, 인물들의 행동 동기와도 이어지지 못하고 그 장면에서 끝난 채 버려지고 만다. 해미의 칼라하리 노을 이야기보다 쓸모없고 버려지고 더러운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게 자연스러운 도덕이라는 벤의 이야기가 훨씬 강하게 종수를 타격한다. 심지어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이창동의 관심사는 해미의 변화나 성장에 있지 않고, 특이한 경험을 하고 돌아온 해미를 구경하는 벤이나, 벤과 같은 부유층의 조롱 어린 응시를 내면화하며 적대감을 키워가는 종수의 성장 쪽에 분명하게 쏠려있는 것이다.


해미의 이야기는 그가 없어지고 나서야 미스터리로서 힘을 발휘한다. 쉽게 말해, 해미는 벤/종수의 서사와 따로 논다. 사라지기 전까지의 해미는, 어쩌면 사라진 후의 해미도, 끝까지 무지하고 순수하고 불가해한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벤이나 종수가 정념을 가진 ‘행위자’인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다. 그래서 나는 이창동이 차라리 해미의 그레이트 헝거 타령을 대사로 넣지 않는 편이 나았을 거라고 느낀다. 분명 존재하나 나머지 인물들과 공유될 수도 조응할 수도 없는 해미의 철학이 오히려 해미를 영화로부터 완전히 소외된 존재로 만들고, 동시에 그에게도 열망과 실천이 있었으니 (이창동의 옛 여성 인물들처럼) 소외되지는 않았다는 착시를 일으킨다. 다시 한번,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 섣불리 오만한 상상을 한 늙은 남감독의 한계.


몇 달 전 기타노 타케시의 스크린에서의 여성 인물 부재는 무시나 배제보다는 '무지에 대한 산뜻한 인정' 쪽에 가깝다고 쓴 적이 있는데 스콜세지 역시 마찬가지다. 기타노 타케시와 스콜세지의 공통된 탁월함은 자신이 모르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무리해 망상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잘 아는 척하지 않고 그냥 그 부분을 공백으로 내버려 두는 태도. 아이리스의 과거나 벳시의 사정을 서툴게 상상하지 않고, 트래비스의 베트남 파병 시절을 어설픈 플래시백으로 재현하지 않는 정직한 생략의 태도.

​그리고 스콜세지와 기타노 타케시의 마초들은 폭력적이되 과잉되지 않다. 그 마초들은 자기보다 약한 대상에게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이미 스러져 가는 중이거나, 마지막으로 단 한 번 모든 것을 불태워 소진하려는 중이지만 그 과정에 자기 자신을 향하는 연민은 보이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일지언정 '약한 나'를 사랑하기 위해 실제로 더 약한 사람을 '나보다는 덜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맞서 싸우는 대상은 주로 갱스터, 야쿠자, 정치인, 포주 같은 인물이거나 제도 그 자체다. 그렇기에 그들은 결국 마초-됨에 실패하고 좌절할지라도 인셀이 아니다. 이창동의 초기작들이 권력자 남성, 서열 문화, 부당한 권위에 복종했던 자신을 변명하기에 급급해 주변 여성들을 착취하든 말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남성을 담은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트래비스라는 (오해받은) 마초는 이해되고, 종수라는 (실패한) 마초 역시 참아줄 만한데, 영호라는 (한국 남성의 시선에서는 전형적인) 마초는 마초라고 부르기도 싫은 것도 그 때문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가의 영화>와 <우연과 상상>, 붙들린 진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