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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해 Jun 26. 2022

<애프터 양>,
네가 우리의 네가 되기 전에


인간과 로봇 사이, 영화라는 기억 장치 '애프터 양' - 김소미 / 22.06.01


필립 K. 딕의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에서 현상금 사냥꾼 릭 데커드는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나?”라고 묻는다. <애프터 양>에서 코고나다 감독은 바꿔 질문한다. 안드로이드도 기억하는가? <애프터 양>이 그리는 근미래는 고도로 발달한 테크노 사피엔스가 보편화된 사회다. 이들은 다인종·다문화 가정에 보급되어 세계 각국의 유산을 일깨워주는 ‘세컨드 시블링스’로 활약하는 지성체이고, 고장난 채 오래 방치되면 부패하는 유기체다. 차(茶) 상점을 운영하는 제이크(콜린 패럴)와 회사 중역인 키라(조디 터너스미스) 부부 역시 입양한 중국인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를 위해 중국인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과 가족을 이룬다. 영화는 원작인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소설 제목처럼 어느 날 갑자기 ‘양과의 작별’이 가족에게 당도한 이후의 여파를 천천히 관찰해나간다. 수리업체를 전전하던 제이크는 양의 중심부에 숨겨진 기억 장치가 있으며, 오래된 리퍼 제품이었던 양에게 또 다른 세월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제게도 차가 그냥 지식이 아니면 좋겠어요.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해요. 장소와 시간에 관해서요.” 안드로이드 양의 간절한 바람은 그가 더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이후에야 진실로 밝혀진다.


<콜럼버스>에서 한 차례 시험한 것처럼 코고나다는 이미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시공간을 프레이밍을 통해 다시 한번 정제하는 비주얼리스트적 면모를 <애프터 양>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일상에 깃든 정적과 침잠, 찰나의 활기는 이번 영화에서 더욱 세밀하고 고혹적으로 그려진다. SF영화가 곧잘 기대는 금속성의 미장센이나 미니멀리즘의 조류를 뒤로한 선택 역시 서사와 유려하게 조응한다. <애프터 양>의 인물들은 천연염색한 면직물을 입고서 오후의 풀밭, 새벽녘의 거실을 떠돌고 양의 디지털 기억 장치 속을 탐험하는 여정은 마치 은하수를 여행하는 꿈처럼 표현된다.


코믹하고 역동적인 가족 댄스 신 직후 양이 고장나는 장면처럼 담담한 아이러니들도 돋보인다. 평화롭고 서정적으로 보이는 일상의 깊은 저류에 불길함도 함께 흐른다는 사실은 <애프터 양>이 일찌감치 제시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미래 사회가 디스토피아적 실체를 교묘하게 지우는 방식에 대한 정치적 은유로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한편 오랜 세월을 기억하는 로봇과 그를 상실한 인간들의 애도는 종종 독특한 편집술로도 조우한다. 기계 인간의 기억법에 대한 코고나다의 상상력은 같은 순간이 다른 관점으로 반복되는 몇몇 장면에서 몰입 대신 관찰과 탐구를 유도한다. 감독이 직접 편집했기에 가능한 약간은 까끌한 문법이야말로 <애프터 양>의 잔상을 오래 지속시키는 확실한 개성이다. (후략)





<콜럼버스>와 <파친코>로 예술성과 대중성을 입증한 코고나다 감독의 작품이고,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상영 후에도 호평이 자자해서 무척 기대 중이었다. 포장을 벗겨보니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좋은 영화였다. 관람 내내 천천히 벅차오른 심정에 비하면 부족할 만큼 살짝 울었고, 여운이 어쩌면 여전히 남아있다. 직접 보여주는 게 아니라면 이 영상물의 아름다움을 글로는 도무지 다 풀어 설명할 수 없겠단 생각에 아쉬웠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지.



영화를 관통하는 매력적인 키워드가 많다. 성실한 비디오 에세이스트가 고찰하는 '영화적 체험'과 그 조건. 한국계 미국인 창작자가 평생 과업처럼 지고 가는 '뿌리' 즉 문화적 정체성이라는 주제의식. SF 장르의 오래된 소재인 기억과 인간다움의 진실성. 공간과 시간을 다루는 건축가로서의 미학.

그중 서사적인 면과 좀 더 깊이 연관된 문화적 정체성, 기억, 인간성에 대한 감상이라면 영화를 본 누구나 쉽게 공감할 것이다. 내가 보다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부분은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가-란 물음과 인간성에 대한 물음을 연결해 나름의 답을 내놓은 코고나다의 인류학적 태도였다.


코고나다는 영화(=수집된 이미지의 연결)의 속성을 탐구하기 위해 양에게는 촬영(수집)이란 속성을, 제이크에게는 그 촬영된 기록에의 열람이란 속성을 나누어 부여했다. 양은 하루에 3초씩 특정한 기준에 따라(낭만적으로 표현하자면 양의 '마음'대로, '마음'에 드는 것들을) 영상을 찍어 몸속 기억장치에 보관한다. 그러는 동안 찍히는 사람들은 "너 지금 뭐 하는 거야?"라며 양의 이상한 표정과 미동 없는 신체에 불안감을 표하기도 한다. 이 불안한 물음은 양이 순간 사람답게 행동하지 않고 기계의 시각을 취하고 있다는 본능적인 공포에 의해 야기된 것이다. 그 순간의 양의 눈은 불완전한 기억(추후 제이크와 카이라가 양과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재현한 것처럼)을 매개하는 인간의 눈이 아니라, 무심하고 목적지향적이며 오류가 없는 카메라 렌즈로서의 기능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카메라 렌즈로서의 양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자신이 '느끼기에' 가장 아름답고 기록할 만한 장면들을 담아왔다. 그렇기에 그의 선별은 모순적이게도 기계답지 않은 면과 인간답지 않은 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양의 기억/기록된 영상은 양의 작동 정지 이후 제이크라는 타인에 의해 첫 관람을 '당한다'. 양의 사적인 역사를 알기 위해 제이크는 선글라스처럼 보이는 특수 장치로 눈을 가리고, 캡슐 같은 셔틀 안에서, 자기 집의 소파 위에서 몸을 뻣뻣이 고정시킨다. 현재의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행하는 '관람'이란 행위와 동일하게 특정한 규칙에 따라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관람 자체도 얼마나 문화적이고 관습적인, 그러니까 인간적인 행위인지. 몸을 크게 움직이지 않으며 정해진 자리에 앉아 있을 것. 옆 사람과 큰 소리로 떠들어 영상물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지 않을 것. 어둠에 나의 신체를 내맡기고 그 속에서 보이는 것은 빛나는 스크린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 그런 '관람'의 규칙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타인의 삶과 관념적인 기억과 가공된 과거를 '체험'할 수 있는 권리를 얻는다. 제이크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의 모든 말에, 영화라는 매체 혹은 언어의 물리성에 대한 코고나다의 사유가 묻어있다.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찍은 결과물을 보는 사람도 '고정'이라는 동일한 코드를 따라야 비로소 영화가 완성된다는 것. 그것이 영화의, 혹은 영화의 포착적 속성의 원형인 사진의 변하지 않을 본질이라고 해도 좋겠다.



동시에 이건 인간성의 조건에 대한 사유기도 하다. 인간의 뇌는 보통 기억을 재구성하고 일부 소실하고 심지어 없었던 사실을 창조해 마치 진짜 기억인 것처럼 인간을 속이기도 한다. 숱한 오류가 있는 이 기억을, 이 불완전성을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완벽하고 온전하고 오류 없는 기억을 간직하는 사람은 AI나 로봇과 같은 비인간적 존재로 담지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며, 그 표현의 일환이 <블랙미러> 103 '당신의 모든 순간'과 201 '돌아올게', 테드 창의 소설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등에서 SF 장르가 수없이 반복해온 소재와 문법이다.

그렇다면 양의 기록은 인간과 비인간이라는 거친 이분법의 세계에서 과연 어떤 범주에 속하는가. 인간처럼 '기억'하지 않고 '포착'하는 기계의 기록으로서 그의 역사는 불연속적이되 사실적이고, 완전하되 공백이 많다. 하루 중 가장 아름답거나 인상 깊거나 끔찍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가장 의미 있는 3초만을 저장한 양의 기록은 의미 있는 순간만을 더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개입된 것도 같고 그런 점에서 증거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SNS의 보존적 성격을 띤다. 인스타그래머블한 그 '역사'는 기계의 끊김 없고 오류 없는 '저장'과도 다르고 인간의 재구성된 '기억'과도 다르다. 그래서 그는 비인간이되 인간인 것이 된다(그리고 그러한 존재로서 새로운 의미를 인정받아 박물관에 안치된다). 이 이중성 혹은 경계성이 이미 지나간 양의 시간을 재고하게 만들고, 현재 이어지는 중인 제이크의 시간을 바꾼다.


제이크와 카이라는 어른이기에 딸 미카와는 사뭇 다른 태도로 양을 대한다. 테크노 사피엔스라는 신인류이자 부품의 작동 여부에 좌우되는 기계에 불과한 양의 인간성을 두고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어린 미카뿐이다. 미카는 양의 작동 정지를 인간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사람이다. 반면 제이크는 양이 때로는 가족이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이 아니란 점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냉정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제이크는 유전자 조작과 안드로이드로 이루어진 근미래 디스토피아에서 홀로 찻집이라는 아날로그에 집착하는 인간이니 말이다. 회사의 중역으로서 실질적 가장 노릇을 하는 카이라보다 제이크가 더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고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임을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그리고 둘의 갈등의 상당 부분은 그 차이에서 비롯되었을 거란 점도). 그런 제이크가 보다 예민하게 반응하는 비인류의 새 종류로서 (다소 갑작스럽게) '클론'이 제시된다.

알고 보니 옆집의 두 딸이나 양의 숨겨진 친구 에이다 역시 누군가의 유전자를 본떠 만들어진 클론이다. 그들은 원본이 아니며, 원본인 인간을 그리워하는 타인의 욕구나 정념이 어쩔 수 없이 그들 존재의 근간이다. 제이크가 정확히 그런 이유로 클론을 거북히 여긴 것인지 영화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지만, 클론인 에이다와 테크노 사피엔스인 양의 '사랑'을 제이크도 납득할 수 있도록 코고나다가 풀어가는 형식은 충분히 흥미롭다. 양이 제이크와 카이라와 미카에게로 와서 그들의 양이 되기 전에 '최초'의 삶이 있었음을 제이크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건 양의 이야기라기보단, 양의 기억을 탐색하는 제이크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와 같은 인간인 우리를 향하도록 설정된 이야기이니까.

미카 이전에 남동생이 있었고 엄마의 죽음까지 지켜봤고 '진짜' 에이다를 사랑했고 에이다의 갑작스러운 죽음까지 맞이한, 그래서 고장을 의심케 할 만큼 깊은 슬픔에 빠졌던, 어쩌면 백 년 전부터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양. 양이 인간 에이다의 (당사자의 의사는 개입하지 않았지만) 클론 에이다를 발견하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진 것을 알게 되며 제이크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무엇이 인간이고 무엇이 인간이 아닌가,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진짜가 아닌가에 대한 그의 인간중심주의적 고집이 차차 무너진 것이리라. 영화가 끝난 후, 그는 미카와 카이라와 함께 그 폐허를 다른 것들로 채워가게 될 것이다.



인물 간의 거리감을 표현하는 장치로서의 공간도 꼭 얘기를 해야겠다. 내게 코고나다라는 감독은 사람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이가 속한 공간을 사랑하는 일의 중요성까지 알고 있는 드문 연출자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인간을 공간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그의 근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코고나다의 '집'을 매개로 한 연출적 재능은 가히 천재 건축가의 재능에 비할 만하다. 이 영화는 좀체 인물 클로즈업 숏을 내세우지 않는다. 인물의 내밀한 감정을 묘사하기 위해 보통 클로즈업을 채택하는 기존의 문법과는 정반대 노선을 택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고집이 보인다.

인물들은 대부분 전신이 노출될 만큼의 먼 거리의 구도에 세워지고, 그나마의 대화도 유리창 너머나 거울에 비친 상을 통해 전달된다. 영화 중 가장 오래되고 촘촘한 긴장감을 내포한 관계는 단연 제이크-키라 부부의 관계인데, 별다른 이유도 없이 그저 건조해지고 권태로워진 이들의 진지한 대화는 1) 영화의 기본 화면비와 다른 화면비를 택한 영상통화 화면을 매개하거나 2) 집 밖에서 유리창 안의 두 전신을 비추는 방식으로 주로 표현된다. 또 다른 긴장 관계에 있는 친절한 이웃 조지 역시 집과 벽을 경계선 삼아서만 등장하고, 고뇌하는 제이크의 표정마저 그가 타는 셔틀의 유리창 안이 아니라 밖에서 비친다. 극적인 클로즈업 숏이 노골적으로 사용되는 씬은 단 세 번. 제이크와 카이라가 각각 차와 나비에 관해 양과 이야기한 기억을 떠올리는 회상 씬과, 미카와 양이 서로 다른 뿌리와 가지를 접붙인 나무에 관해 이야기한 씬뿐이다.

엔딩 씬에서 제이크는 다시 한번 양의 역사를 여행하며 소파에 홀로 앉아있다. 그의 등 뒤 유리창 너머로 집의 중정이 비치고, 곧이어 잠에서 깬 미카가 방문을 열고 등장해 마루를 지나 제이크가 있는 공간으로 건너온다. 명확하게 분리된 각자의 공간을 자유로이 노니는 어린아이의 이미지가 제이크라는 단단한 경계 안으로 틈입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영화에서 최초로 제시한 제이크-미카의 진실하고 쌍방인 교감이자, 영화의 최후임을 자연스레 알 수 있게 된다. 이 영상이 최후를 맞은 후, 박물관에 영원히 남게 된 양의 신체와 인생이, 그가 남겨두고 간 에이다와 제이크와 카이라와 미카가 어떻게 될 것인지 우리는 모르지만 미카가 릴리 슈슈의 Glide를 부르며 끝은 다가온다.

하지만 양의 말대로, 끝이 그저 끝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 같다.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요."



'애프터 양' 코고나다 감독, "그게 무엇이든, 세상의 일부가 되어" - 인터뷰어 김소미 / 22.06.09


-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의 기억을 탐구하는 태도에 있어 <애프터 양>은 영화에 관한 영화로도 읽힌다. 알렉산더 와인스타인의 소설 <양과의 작별 Saying Goodbye to Yang>을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주목한 지점은 무엇이었나.

= 내게는 영화 만들기가 기억이 작동하는 과정과 유사하게 느껴진다. 영화를 찍는 과정이란 무언가를 촬영하면서 특정한 몇 가지 버전을 시험한 뒤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 하나를 골라내는 작업이 아닌가. 와인스타인의 소설은 양의 기억을 생략한 채 아버지의 회상만을 제시한다. 바로 그 지점에 숨겨진 기회가 있었다. 시나리오 단계에서 양의 기억을 새롭게 써내려가기 시작했고 기억 장치를 디자인했다. 그 안을 탐험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내 주된 관심사 중 하나였다.


- ‘기억’이라는 개념에 관해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서 작업에 임했나.

= 인간은 같은 기억이라도 머릿속에서 매번 다르게 떠올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 않나. 기억한다는 것도 결국은 각자가 믿는 감정과 견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영화 속에 카이라(조디 터너스미스)의 기억 속에 양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있는데, 그 장면을 찍을 때 실제로는 양이 울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이라 자신이 슬퍼져서, 양에 대한 과거의 기억도 좀 더 슬픈 형상으로 재연되는 게 아닐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은 좀 더 따뜻하고 다정한 방식으로 변할 수도 있다. 평소에 스마트폰으로 내 아이들이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찍을 때에도 비슷한 고민을 한다. 지금 녹화해두면 앞으로 이 기록을 평생 그대로 보존할 수 있겠지만, 만약 찍지 않고 그저 내 머릿속에 저장해 둔다면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억은 오히려 더 좋은 방향으로 자라날지도 모를 일이다.


- 인간의 기억법과 기계(카메라)의 기억법, 또 나아가 둘 사이의 간극이 어떻게 영화의 눈(키노-아이)과 만나는지 <애프터 양>은 인상적으로 제시한다. 가족이 사진을 찍는 장면, 제이크(콜린 파렐)-카이라 부부가 양을 떠올리는 대화 장면들이 그렇다.

= 가족사진을 찍는 장면에선 인물들의 맞은편에 카메라가 있고 그 옆에 안드로이드 양이 있다. 실재하는 기록이며 언제든 반복해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족을 바라보는 카메라, 양의 기억 장치는 비슷한 데가 있다. 양과 제이크가 차에 대해, 양과 카이라가 나비에 대해 대화하는 신에서 인간만의 기억 방식을 색다르게 표현하고 싶었다. 마치 누군가 자기 기억의 장소로 접속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느껴지도록, 기억이 층층이 충돌하거나 반복되는 느낌으로 묘사했다.


(중략)


- 피사체로서 미국의 모더니즘 건축물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 현대 건축은 일면 매우 차갑게 느껴지지만 모더니즘 운동은 그 기원에 인간의 진실과 의미를 탐구하려는 열정을 품고 있다. 종교의 시대가 저문 뒤 서구 예술은 삶의 공허함을 탐구했고 그 감상을 건축 디자인에서도 전하기 시작한 셈이다. 대안적 사고, 동양적 사상에 대한 관심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이 디아스포라인 내게 영화의 배경으로서 모더니즘 건축이 적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기본적으로 비어있는 공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 편이기도 하다. 실존과 무(無) 사이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내게 모더니즘 건축은 유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 한국계 미국인 감독, 한국계 미국인 배우(저스틴 H. 민)가 함께했지만 <애프터 양>은 중국인 안드로이드에 관한 이야기다. 한국인의 고유한 헤리티지보다는 ‘아시아성’에 대해 포괄적으로 논의하고 싶었던 걸까.

= 디아스포라가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을 끊임없이 조국 바깥에서 바라보도록 만든다. 양이 중국인이란 정보는 진짜라고 볼 수 없다. 안드로이드 양은 우선 아시아인의 외양으로 제조된 다음, 여러 회사를 거치면서 제이크 가족에게 중국인 역할을 하도록 설정되었을 뿐이다. 미국인이자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들의 처지도 일면 그러하다. 우리는 국적이나 민족과 관계없이 우선 아시아인으로 묶여 분류된다. 아시아계 디아스포라들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왔음에도 많은 경험을 공유하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고 자연스럽게 서로 상호적인 정체성이 형성된다. 양이 제이크에게 자신도 차에 대한 진짜 기억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이 또한 전세계의 많은 디아스포라들이 자신의 헤리티지에 대해 느끼는 갈망과 비슷할 거라 본다.


- 이와이 슌지 감독의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오리지널 스코어 <Glide>를 핵심 테마로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

=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은 내게 소외감, 외로움, 그리움이라는 감각을 강하게 남겼다. <애프터 양>의 대본을 쓸 때 재밌게도 머릿속에는 온통 <Glide>가 재생되고 있었고, 어느 순간 이 음악을 영화에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노래 가사처럼 <애프터 양>은 단지 인간이 되는 것뿐만 아니라 그저 존재하면서 어떤 형태든 세상의 일부가 되는 것에 관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 당신은 스토리텔링의 측면에서는 비경제적이라 할 수 있는 잉여의 숏을 사랑하는 감독이다. 비디오 에세이스트로 보여준 탁월한 몽타주의 감각이 <콜럼버스> <애프터 양>에도 깃들어 있다. 풍경과 공기, 누군가의 자취,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을 포착한 인서트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보나.

= 인생은 끊임없이 지나간다. 그래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관해 탐구할 수밖에 없다. 양이 한번에 단 3초만 녹화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곧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놓치고 마는 아주 작은 것에 주목한다는 사실이 제이크를 눈뜨게 한다. 나는 제이크가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 조용히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양을 통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의 아름다움, 딸과 가족에 얽힌 아주 평범한 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한번은 <콜럼버스>의 진(존 조)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는 케이시(헤일리 루 리처드슨)의 눈을 통해 자기 아버지가 가치 있게 생각한 것들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항상 더 크고 바깥의 것, 다른 세상의 것에 흥분하지만 우리가 찾는 것은 정작 우리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앞에 있을 수도 있고.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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