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며 드는 생각
그저께 탄천을 30분 정도 달렸다. 5분 가볍게 뛰고 1분 가볍게 걷는 것을 5번 반복하는 루틴이었는데 마지막 5분은 다 채우지 못했다. 사실은 5분도 달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몸이 가벼웠고 30분에 가까운 시간을 중간에 주저앉지 않고 달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아직 죽지 않았어..
사실은 달릴 때 힘든 것보다도 다음 날 밀려오는 근육통이 더 두려웠다. 당연히 다음 날 뻐근한 허벅지로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할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이다.
다음 날은 공휴일. 출근하지 않는 날이니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천천히 산에 갈 준비를 했다. 간단하게 물만 챙긴다. 준비물은 모자와 선글라스 정도. 등산을 시작한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왕복 2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하였다. 지난번 코스 파악 겸 올랐을 때는 1/3 정도 올랐을까. 이번에는 그보다는 더 높이 올라가 보자.
날씨가 꽤 더워졌다. 평지를 걸을 때는 괜찮았던 허벅지가 터질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올라간다. 간간히 사람들을 마주쳤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산책을 하듯 천천히 걸으신다. 심지어 맨발로 걷는 사람도 많다. 지난번 올라갔던 지점까지 겨우 올라갔다. 중간에 두 번 정도 쉬었다. 힘들다.
스마트폰을 보지 않는다. 이어폰도 끼지 않았다. 오로지 나의 숨소리, 심장 뛰는 소리, 그리고 낙엽과 나뭇가지 밟는 소리, 새소리 밖에 없다. 조용하다. 아니다. 내 머릿속은 시끄럽다. 나의 생각을 마비시키는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맘카페가 눈에서 사라지니 다시 머릿속에서는 나만의 생각이 샘 솟아오른다. 그래.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였다. 쉰답시고 집에 있었더라면 누워서 유튜브나 멍하니 보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정상은 무리였다. 그래도 지난번 올랐던 곳보다는 좀 더 올라갔다. 아마도 그 지점이 경사가 가팔라지면서 힘들기 시작하는 구간인 것 같다. 그렇지만 정상까지 가보지 않았으니 그 구간을 넘어갔을 때 어떤 길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시험이나 성적, 입시가 없는 삶. 누구에게서도 목표를 강요받지 않는 삶. 지금의 나는 그렇다. 힘들다고 돌아서 내려와도 아무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나 스스로도 오늘은 두 번째니 다음에 더 많이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고등학생인 딸은 나와는 다르다. 엊그제는 모의고사를 봤다. 매일 학원 숙제를 하느라 새벽 한 두시에 잠이 든다. 시험을 보는데 너무 졸리고 정신이 없어서 시험을 못 봤노라고 했다. 진짜 그랬을 수도 있고, 점수가 잘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한 변명을 미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기어이 시험 전 날에는 잠도 충분히 자고, 미리 컨디션 관리를 했어야 하지 않느냐고 한 마디를 하고야 말았다. 본인이라고 그걸 몰랐을까. 지필 평가에, 모의고사, 수행평가 등 몰아치는 평가와 학원 수업, 넘치는 과제를 해내는 것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일임을 모르지 않는다. 아니다. 20년도 더 전에 내가 겪었던 고등학교 시절은 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빛이 바래서 그저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았으니 어쩌면 나는 아이의 절박함, 불안함, 초조함을 모른다. 이제 나의 삶에는 아무도 목표와 경쟁을 강요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좀 더 열심히 하지 그랬느냐고, 지금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된다고. 그런 말을 하는 나는. 얼마나 열심히 살았나.
열심히 살지 않은 건 아니다. 엄마로, 아내로, 직업인으로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나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려고 했다. 나로 인해 누군가에게 불편이나 결핍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를 다듬고, 다그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0년이 넘게 살아온 나의 삶을 뒤돌아보고, 앞으로 남은 수십 년의 삶을 앞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내가 이뤄온 것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묻게 된다. 40년쯤 살았으며, 20년쯤 한 직종의 직업인으로 살아왔다면 지금쯤 뭐라도 이뤘거나 아니면 이루기 위한 발판이 만들어졌어야 하는 건 아닌지 말이다. 후회, 반성, 불안의 감정이 자꾸 나를 뒤흔든다.
자꾸 뒤를 돌아본다는 건, 내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른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과거에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자꾸 더듬으며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정상을 밟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 다시 산을 내려온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가는 길보다 더 힘들다. 가파른 산길을 넘어지지 않으려면 다음 발을 디딜 곳만 바라보면서 가야 한다. 내려간다는 건 그런 건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딛는 걸음에 집중하고, 발을 잘못 디디면 미끄러질 수 있으니 균형을 잘 잡고 한 발, 한 발.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며 어쩌면 나는 인생의 중요한 과제들을 이미 완수했고, 이제 그것들을 지키고 안정을 유지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삶의 상황이라는 것은 계속 변한다. 아이는 자라고, 나는 직장에서 경력자가 선배가 되었으며, 사회에서 나는 더 이상 젊은이가 아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나는 회복하고, 신발끈을 동여매고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야 한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올라가던 길, 아주 천천히 올라가시는 노부부가 있었다. 나는 가뿐히 그분들을 제치고 걸음을 재촉하며 산을 올랐다. 하지만 내가 지쳐 포기하고 내려가던 길, 여전히 같은 속도로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 두 분을 만났고, 나는 그분들을 스쳐 내려왔다. 인생은 길다. 너무 서두르면 쉽게 지치고, 빨리 정상에 다다르면 내려와야 한다. 올라갈 때는 내가 가야 할 곳을 가늠한다. 자꾸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