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나를 본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에게 제안했다. 기차를 타고 눈 덮인 강원도로 가라고.
알고리즘의 유혹에 걸려든 나는 기차를 예매한다. 청량리에서 민둥산으로 가는 정선 아리랑 열차를.
그 열차를 타고 가면 정선 오일장, 그리고 강원도의 이제는 기차가 서지 않는 기차역, 레일바이크, 케이블카 등을 즐길 수 있다고 유튜브는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시티투어 버스가 있다고.
나는 정선 시티 투어 버스를 검색한다.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는 블로그의 후기를 보고 버스 예약 사이트를 찾는다. 그런데... 아쉽게도 관광업체 계약이 안되어 1월에는 시티투어버스를 운영하지 않는다는 안내만 올라와 있다.
시티투어 버스를 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일단 기차 예약만 해 두고 생각해 보자.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내가 가는 날 하루 전에 정선에는 눈이 내리고, 한파가 몰려와 기온이 뚝 떨어진다. 아~ 이건 신의 계시다. 어쩌면 이렇게 날짜도 찰떡같이 맞췄는지.
나는 상상한다. 하얀 눈이 가득 덮인 세상을 기차를 타고 가면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상황을. 그저 기차를 타고 가면서 왕복 다섯 시간 동안 눈 쌓인 바깥 풍경을 보기만 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건 그거였다. 그렇다면 시티투어 버스는 타지 않아도 된다. 그냥 기차 타고 눈 구경하면서 갔다가 오기만 하자.
8시 30분에 청량리역에서 출발하는 정선아리랑 기차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집을 나셨다. 평일 아침의 지하철은 출근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직장으로 가는 그들 사이에 눈구경하러 기차 타러 가는 나. 묘한 기분이다. 시간에 맞춰 기차를 타고 여유롭게 출발한다. 나에게는 아무 계획도 없으니. 그저 창 밖만 바라보면 된다.
조금만 더 경기도를 벗어나면 눈이 가득 덮인 세상이 나오겠지? 얼마나 황홀할까. 그런데 기차가 아무리 달리고 달려도 경기도를 벗어나 강원도에 들어간 지 한참이 되어도 눈 덮인 세상은 나오지 않았다. 나의 예상을 너무나 빗나갔다.
최종 목적지인 민둥산 역에 내린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역 바깥으로 나간다. 밖에 시티투어 버스가 서 있다. 이건 뭐지. 분명히 운영하지 않는다고 봤는데, 바뀌었나? 하지만 미리 예약을 하지 않은 나는 탈 자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레일바이크도, 나전역도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눈을 보고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다. 눈을 볼 수 있는 곳을 다녀와야겠다.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타야겠다. 산에 올라가면 눈이 많겠지.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1시간 10분 정도 걸려 갈 수 있다. 실시간 버스 조회를 해 본다. 버스 도착 정보가 뜨지 않는다. 버스가 언제 오는지 모른다. 도시에서 분단위로 끊임없이 오는 버스와 지하철에 익숙했던 나는 당황한다. 무엇보다 시티투어버스가 기차에서 내린 관광객들을 태우고 떠난 민둥산역 주변은 조용하기 이를 데 없다.
일단 밥을 먹기로 한다. 근처 오래되어 보이는 중국집으로 들어간다. "금용반점". 신발을 벗고 들어가 전기장판이 깔려 있는 바닥에 앉아서 먹는 중국집이라니. 마음에 든다. 자장면 한 그릇을 시킨다. 출발은 순조로웠으나 나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이 여행을 어찌해야 할지 먹으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정보를 찾다 보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44분 후에 온다고 뜬다. 다행이다. 천천히 점심을 먹고 나가서 버스를 타면 딱 알맞은 시간이다.
점심을 먹고 나와 제시간에 도착한 버스를 탔다. 낯선 장소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주변 풍경, 동네, 상점, 사람들을 보면서 간다. 정선 시내로 들어가 버스에서 내려 갈아타야 하는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다음 버스 정보가 안 뜬다. 좀 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버스가 어느 정도 가까워져야 알 수 있는 것 같다. 무작정 기다려야 하나. 만약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탄다고 해도 내려와서 역으로 가는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버스가 없을 수도 있다. 집에는 갈 수 있을까. 지금 민둥산역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기차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다가 밤늦게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으니.
다시 검색한다. 진부역으로 가는 버스가 곧 온다. 거기서 ktx를 타고 갈 수 있다. 마침 버스를 타고 가면 기차 시간과 얼추 맞는다. 거기로 가자. ktx 타고 집으로 가면 된다. 곧 진부역으로 가는 버스가 내 앞에 선다. 그리고 나는 그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간신히 3시에 출발하는 기차를 예매한다.
안심이 되었다. 내가 할 일들이 정리가 된다는 것이. 그런데 갑자기 내가 탄 버스가 진부역을 가는 버스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다시 카카오맵을 켜고 버스 노선을 검색한다. 그런데 이 버스는 바로 내가 가려고 했던 가리왕산 케이블카를 타는 곳을 지나는 버스가 아닌가. 그럼 다시 거기서 내려서 케이블카를 타러 가야 하나? 기차표는 다시 취소하나? 케이블카를 타고 다시 돌아오는 기차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추운 날 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어두워져서 낯선 곳을 돌아다니고 싶는 않은데. 결국 이런 고민들을 하다 나는 결국 가리왕산 케이블카 정류장에 내리지 않는다.
거기서 내렸어야 했을까. 내렸더라면 일생에서 잊히지 않는 풍경을 봤을까. 내가 원하던 눈 덮인 겨울 풍경을 볼 수 있었을까? 거기에 가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될까. 아니다. 모른다. 나는 거기 가지 않았으니 당연히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내가 본 건 우물쭈물 하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다.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났다. 익숙한 환경과 단순한 루틴 속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선택을 하는 내가 아닌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고 제한된 정보 속에서 내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두려워하고 선뜻 한 발을 떼지 못하는 나.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예기치 못한 상황을 즐길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못 돌아가면 여기서 하루 더 있다가 가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는 어떻게든 정보를 검색해서 기왕에 간 여행을 알차게 보내고 올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정선까지 가서 눈 구경도 못하고 짜장면 한 그릇만 먹고 돌아왔다.
아니면 처음 계획대로 민둥산역을 벗어나지 않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낸 후에 다시 청량리역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시티투어 버스를 타는 사람들, 나는 못 보는 멋진 경치를 볼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남들이 다하는 것을 나는 못한다는 것에 대한 조바심도 있었을 거다.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갈 수 없다는 마음.
돌아오는 기차에서 나는 복도 쪽에 앉았다. 창가 쪽에는 할아버지 한 분이 먼저 앉아 계셨다. 날씨가 꽤 추웠는데 패딩이 아닌 정장 점퍼를 입고 계셨다. 오랜만에 외출을 하시는 걸까. 어르신은 몸을 창 쪽으로 완전히 돌려 앉아 창 밖을 바라보고 계셨다. 기차가 터널에 들어가 어두워지면 다시 바르게 앉으셨다가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바깥 풍경이 보이면 몸을 돌려 창에 바짝 붙어 앉아 밖을 내다보았다. 할아버지에게 맞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그 모습이 귀엽다 느껴졌다. 어떤 연유로 서울을 가시는 걸까. 혼자 가시나. 기차를 오랜만에 타는 건지도 모르겠다. 창밖을 내다보는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어쩌면 저 정도의 설렘만 느끼고 끼고 싶었던 것 같다. 안전한 곳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나는 선뜻 뛰어들지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강원도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던 거다. 나는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여기저기 기웃대기만 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내가 찜찜한 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은 것?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몰랐던 것?
낯선 곳에서 다시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