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이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유명한 첫 문장은 들어 봤을 것이다. 겨울이 되면 한 번씩 회자되는 유명한 고전이다.
창문을 열어 큰 소리로 역장을 부르는 여자가 주인공 시마무라의 눈에 들어오면서 책은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요코, 슬프도록 아름다운 목소리. 눈의 고장으로 가는, 긴 터널을 빠져나온 바로 그 기차다. 수증기로 젖은 유리창을 닦아내자 유리는 거울이 되었고, 차가운 거울에 그녀의 옆얼굴이 맺힌다. 저녁 어스름한 풍경과 여자의 얼굴이 겹쳐진다. 투명하고 차갑다. 그녀는 동행인 남자와 함께 시마무라와 같은 역에서 내린다. 우연일까.
그는 고마코를 만나러 왔다. 일 년 만에 연락도 없이. 사과나 변명이 먼저였을 테지만, 그녀가 그를 그리워했다는 것을 알고 묘한 기쁨에 휩싸인다.
시마무라는 부모님께 받은 재산으로 무위도식하며, 아무도 읽지 않을 서양 무용에 대한 글이나 쓴다. 아내와 아이는 도시에 두고 혼자서 산행을 즐기며, 간간히 온천장에서 게이샤를 부른다. 그러다 고마코를 알게 되었다. 고마코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선생님 댁에서 샤미센을 배우는 아가씨였으나 이제는 게이샤가 되었다.
사방의 눈 얼어붙는 소리가 땅속 깊숙이 울릴 듯한 매서운 밤 풍경이었다. 달은 없었다. 거짓말처럼 많은 별은, 올려다보노라니 허무한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다고 생각될 만큼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별무리가 바로 눈앞에 가득 차면서 하늘은 마침내 저 멀리 밤의 색깔로 깊어졌다. 서로 중첩된 국경의 산들은 이제 거의 분간할 수가 없게 되고 대신 저마다의 두께를 잿빛으로 그리며 별 가득한 하늘 한 자락에 무게를 드리우고 있었다.
겨울 먼 산의 풍경이, 침묵 속 계절의 소리가 수묵화처럼 펼쳐지는 표현이다. 시마무라의 서늘한 눈빛으로 그려내는 설국의 풍경이다.
고마코는 도쿄에 있을 때 동기였던 자신을 돈을 주고 빼낸 남자와 결혼하고 자신은 일본 무용 선생으로 성공하려 했으나 남편이 죽고 이 눈의 고장까지 오게 되었다. 그녀는 항상 말끔했다. 발끝까지. 그녀가 머무르는 방도 그녀만큼이나 정갈하다. 하루도 빠짐없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의 방으로 찾아오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숨기지 않는다.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픈 자신의 아들과 맺어지길 마음으로 바랬다는 것을 알고 그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게이샤가 되었다고 한다. 항상 얼굴이 빨갛게 달뜬 그녀는 차가운 눈의 고장에서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발한다.
요코는 앞에 나서지 않는다. 부엌일을 돕거나 아픈 사람을 간호한다. 서늘하고 차가운 눈.
그러나 요코가 이 집에 있다고 생각하니 시마무라는 고마코를 부르기가 왠지 꺼려졌다. 고마코의 애정은 그를 향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아름다운 헛수고인 양 생각하는 그 자신이 지닌 허무가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고마코의 살아가려는 생명력이 벌거벗은 맨살로 직접 와닿았다. 그는 고마코가 가여웠고 동시에 자신도 애처로워졌다. 이러한 모습을 무심히 꿰뚫어 보는, 빛을 닮은 눈이 요코에게 있을 것 같아, 시마무라는 이 여자에게도 마음이 끌렸다.
아름다움과 슬픔. 순수와 허무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 고마코와 요코. 이야기는 이 두 가지 이미지와 온도, 감정으로 진동한다. 시마무라 삶은 이도 저도 아닌, 책임감도 진심도 없는 그야말로 방관과 허무로 점철된 삶이다. 긴 터널을 거쳐 눈의 고장으로 들어온 그는 이 진동의 에너지에 흔들린다.
여관 주인이 특별히 꺼내 준 교토산 옛 쇠주전자에서 부드러운 솔바람 소리가 났다. 꽃이며 새가 은으로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솔바람 소리는 두 가지가 겹쳐, 가깝고 먼 것을 구별해 낼 수 있었다. 또한 멀리서 들리는 솔바람 소리 저편에서는 작은 방울 소리가 아련이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마무라는 쇠주전저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 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말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고치 창고의 화재로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하늘에서는 은하수가 쏟아져 내린다. 요코가 고치 창고 2층에서 떨어지고 고마코는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가 요코를 구해온다. 눈의 고장에서 진동하던 에너지가 폭발한다.
일본 특유의 허무주의 감성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첫인상과 달리 섬세하고 서정적인 표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문학의 경지에 감탄하게 된다. 현실 같지 않은 겨울의 풍경 속에 고요하게 삶의 이면과 인간의 감정을 응시하게 만든다. 고전이 왜 고전인지는 읽어봐야만 진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설국>의 첫 문장만 맛본 사람은 왜 겨울에 이 책을 꺼내 들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