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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디얇은 하얀 천으로 섬세하게 만들어낸 작은 드레스

크리스티앙 보뱅, <작은 파티 드레스>

by 꿈꾸는 앤 Feb 02. 2025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식으로 만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아니 사실은 내가 읽은 책들은 다 이렇게 나와 만났다. 재미있어 보여 샀지만 생각보다 별로여서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가 한참을 지나 무심코 펼쳐 들었는데 너무 마음에 와닿는 책인 경우도 있고, 우연히 읽게 된 책이 그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건네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책들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만나야 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말이다. 그리고 내 책장에는 바로 그 순간에 나와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아주 많다.


 “그런데 때론 어떤 사람들에게, 더 적은 수의,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다름 아닌 독자들이다. 가던 길을 남들이 포기하는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무렵에 이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독서의 길로 뛰어드는 그들은 언제까지나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그 길이 끝이 없음을 알고 기뻐한다. 기쁨과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그들은 출발점에, 첫 경험에 집착한다.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경험이다. 그들은 언제나 그 지점에 머무르며 삶이 다해가는 순간까지 책을 읽는다. 고독을 발견했던, 그러니까 언어들의 고독과 영혼들의 고독을 발견했던 첫 경험의 언저리에 머문다. 더 많이 읽을수록 아는 건 점점 더 적어진다. 이 사람들이 작가와 서점, 출판사, 인쇄소를 먹여 살린다. “


 서문의 이 대목을 읽으면서 가장 적절한 시간에, 가장 적절한 책을 만났구나. 그리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를 하겠구나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나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책을 읽는 건 고통이 제자리를 찾게 하려는 거예요.”


시인이 쓴 에세이는 시인의 감수성이 배어 있다. 시인이 말하는 방식은 소설가가 말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보뱅의 글은 에세이지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시를 읽는가 하다 보면 글 속의 서사에 공감이 된다. 글 속에는 내가 있었고, 나와 같은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무용한 행위에 천착하며 자기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사람들.


보뱅의 예민하고 섬세한 언어로 침묵하고 몽상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을 보듬는다. 세상에 나오지 않는 그들의 삶을 살며시 들춰내어 시처럼 엮어낸다. 연필로 써두고 엄지손가락으로 살포시 문질러댄 것 같은 그의 문장이 좋다. 얇은 베일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듯 아득하다.


그의 또 다른 책 <환희의 인간>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합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설레는 마음을 가다듬고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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