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다는 변명과 위로 사이

박찬욱, <어쩔수가없다>

by 꿈꾸는 앤

박찬욱은 이제 자신만의 장르를 만들었다.

<헤어질 결심>을 보고 각본집과 스토리보드북까지 구입해서 탐독했던 나는 이번 박찬욱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두 가지 마음이 오고 갔다.

<헤어질 결심>보다 더 좋을까?/좋지 않았으면 좋겠다./더 좋았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생각은?

좋다. <헤어질 결심>과는 다른 의미로.

박찬욱 감독 영화 특유의 미장센이 그의 영화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게 없으면 박찬욱 영화가 아니다.


(이어지는 글에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주의)


1. 주인공은 왜 제지회사에 다니는가(요즘 세상에 종이 만드는 사람은...)

왜 하고 많은 회사 중 종이를 만드는 회사인가. 종이는 가장 아날로그적인 재료이다. 책, 공책, 편지 등을 생각하면 그렇다. 싸고 흔한 재료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만큼 다양한 곳에 쓰인다. 고지서, 영수증, 담배필터 등. 흔하고 구하기 쉽고, 대체되기도 쉽지만 어떤 면에서는 유일무이한 존재. 직장에서 해고된 주인공과 닮았다.

종이 만드는 자동화 공장의 유일한 인간 매니저 유만수. 가장 디지털과 멀어 보이는 것을 만들면서 인간을 소외시킨다.

순백의 하얗고 감촉이 좋은 고급 종이도 결국은 힘으로 우악스럽게 잘라내서 넘어뜨린 나무로부터 나온다. 마지막 나무들이 무참히 잘려나가는 장면이 왜 등장했을까 생각했는데 먼지 하나 없는 완벽한 자동화 공장에서 생산되는 종이와 대비되었다. 만수의 완벽한 삶을 위해 그가 '어쩔 수 없이' 저질러야 했던 잔인한 행동들과 겹쳤다.

만수는 식물 가꾸기와 분재를 취미로 한다. 집에 온실도 갖추고 있다. 만수의 부인 아라는 그에게 꼭 제지 회사여야만 하느냐고 묻는다. 식물과 관련한 취미를 살리면 다른 일을 해볼 수 있지 않느냐고. 이와 똑같은 장면은 몇 분 전에 데자뷔처럼 등장했다. 만수의 경쟁자, 제지회사에서 해고당한 실직자 최선출이다. 집에 엄청난 오디오 시스템을 갖춰놓은 오디오 애호가. 그의 아내도 그에게 말한다. 음악 감상 카페를 하면 제지 회사 다닐 때보다 돈을 더 벌거라고. 하지만 둘은 단호히 말한다. 내가 25년 동안 해온 일이 종이 만드는 거라고. 그들에게 다른 선택은 없다.



2.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감추어진 주름과 틈은 존재한다.

균형을 유지하던 일상의 끈이 끊어지면 구질구질한 삶의 민낯이 드러난다. 어쩔 수 없이.

마당에서 바비큐를 굽고, 커다란 레트리버 두 마리를 기르고, 딸은 첼로를 연주하며 아내는 가족들을 보내놓고 테니스를 치고 춤을 배우며 여가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가장의 실직으로 그들의 삶은 순식간에 바뀐다. 바비큐는 분홍 소시지 전과 멀건 소고깃국으로 바뀌었고, 차를 바꾸고, 취미 레슨은 모든 끊고 딸의 첼로 레슨만 남긴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아라도 치위생사로 취업하게 된다.


비밀과 오해로 금이 간 관계는 덮여 있던 과거 상처를 자신의 입으로 들추어내며 이들의 삶이 생각보다 그림 같지 않음을 드러낸다. 아마 오랜 인내와 노력으로 만들어왔을 거다. 그렇게 한 순간에 무너질지 모르고. 하지만 완벽한 삶이란 과연 존재할까. 저 멀리 떨어진 섬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놓고 주말마다 찾아가서 장작불에 고기를 구워 먹는 삶을 상상했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함께 고기를 굽고 술잔을 기울일 사람이 옆에 하나도 없다.


그저 우리는 매일매일을 애쓰며, 때로는 무릎 꿇고 때로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을 밟고 내 것을 지켜내며 산다. 그리고 뒤돌아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 보인다.



3. 우리는 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어.

정말?

그래. 어쩔 수가 없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어?

어쩔 수가 없잖아.

그래 알아. 어쩔 수가 없었네.


주인공들이 영화 안에서 무심코 내뱉은 말 "어쩔수가없다". 너의 사정은 안타깝지만 내 사정도 만만치 않으니 어쩔 수 없어. 힘들지만 어차피 위에서 내 말을 들어줄 것 아니니 어쩔 수 없어. 내가 잘 되려면 너를 밟아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 마치 하나의 관용구처럼 쓰인다. (영화 제목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주인공 유만수가 경쟁자들을 없애는 방식은 점점 잔인해지고 치밀해진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묻는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었냐고.

만수는 대답한다. '어쩔수가없다'고. 변명, 합리화의 다른 말.

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어쩔수가없다"의 다른 의미를 알게 된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연주를 들려주지 않던 딸의 첼로 연주가 흘러나오며, 출근하는 만수의 모습과 눈물을 흘리며 연주를 듣는 아라의 모습을 비추며. 내가 말한다. "어쩔수가없다... 저것을 지키려면."

어쩔 수 없이 바둥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어쩔 수 없다는 변명으로 합리화하는 선택들. 희극이자 비극인 인생을 그저 비꼬아 말할 수 없는 건 내가, 우리가 그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수가 '어쩔수없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나는 위로를 받았다.


우리가 아둥바둥 살아가는 이유는 내 삶의 가느다란 한 줄기 빛을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하기 때문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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