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까 봐 살짝 기웃거려 봤는데
꼭 이맘때쯤. 나뭇잎이 떨어져서 나무가 헐벗고, 찬 바람이 불어와 온 세상이 마치 동면에 들어갈 것 같은 어수선한 분위기인 바로 이맘때.
가을을 타는 건지 모르겠지만 번아웃이랄지 뭐라 이름 붙여야 할지 안 수 없는 무기력과 자기혐오, 우울감이 나를 잠식하는 그런 시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누워 일본 배구 애니메이션 <하이큐>를 정주행 한다. 처음부터 마지막 시즌까지 쭉. 파이팅 넘치는 주인공들의 성장기를 보고 있으면 나도 그들처럼 힘을 내서 열심히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짜인지 자기 암시인지 모르지만 힘이 나는 것 같다. 열심히 살아야만 할 것 같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자꾸 보니 내성이 생겼는지 약발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그럴 땐 미드 <씰팀>으로 옮겨간다. 아군과 적군이 명확하고 그들의 작전은 대담하며, 무엇보다 시원한 액션은 통쾌하다.
지난 몇 년 간 나는 이 두 개의 시리즈를 나를 일으켜 세우는 파이팅 루틴으로 삼아왔다. 의욕이 넘치며 거침없는 주인공들을 보며 대리만족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보다 보니 이 작품들을 보고 내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믿고 있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일이든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삶의 철학과 맞닿은 부분이 있다. <하이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주전 선수가 아닌 핀치서버인 야먀구치가 월등한 신체 조건과 실력을 가진 미들블로커 츠키시마의 멱살을 잡고 소리치는 부분이다. "프라이드 말고 뭐가 있겠어!!" 고작 부활동을 왜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다는 냉소 섞인 츠키시마의 말에 평소 그의 추종자였던 야마구치가 유일하게 받아치던 장면이다. 좋은 결과를 이뤄내지 못할 수도 있고,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으며, 끝내 약점을 극복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하냐는 세상의 질문에 저렇게 명쾌하고 멋진 답을 본 적이 없다. 어떤 의미를 찾기 위해서 아무리 밖에서 찾아본들 그런 건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결국 내 안의 프라이드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직업이든 밖에서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고충과 애환이 있기 마련이다. 멋져 보이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돈도 많이 버는 것 같은 일도 상사에게 쪼이고, 동료와 갈등이 있으며 고객에게 받는 사소한 클레임 때문에 스트레스받는다. 인정받는 만큼 높은 업무 능력과 도덕적 기준을 요구받으며, 많이 버는 만큼 큰 리스크를 감수해야 하거나 남들보다 더 희생하는 것이 있다.
산다는 건 어느 위치에 있건 하루하루 나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며, 그 하루하루가 늘 빛나기만은 하지 않다는 것.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는 뭐 별거라도 있나.
그럴까 봐 살짝 기웃거려 봤는데
별거 없더라.
산다는 건 다 똑같더라.
그냥, 그냥 매일매일 사는 거다.
다들 넘어지고, 뒤통수맞고, 좌절하고, 털고 일어나기도 하고, 때로는 좀 누워있기도 하면서
그러다 가끔 일어나는 빛나는 순간에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더라.
그런 사실을 다시 되새기는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