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마지막 안식처 스플리트
Background Music - 베토벤 :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中 2악장 아다지오 운 포코 모쏘
유독 길었던 하루의 마지막 일정인 스플리트로 향하는 길. 척박한 돌산과 멀리 보이는 아드리아해가 보이기 시작했다. 도시가 아닌 풍경을 보면서 ‘이국적’이라는 느낌을 받기는 또 처음이었다. 이국적이라는 표현보다는 어릴 적 읽었던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나올 법한 풍경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았다. 이를테면 바다를 향해 뻗어있는 가파른 절벽 위로 헤르메스가 등장을 한다던가, 아니면 어머니 카시오페이아 왕비의 망언으로 바다괴물에 잡아먹힐 뻔했던 에티오피아의 공주 안드로메다를 구하러 가는 페르세우스가 나타난다던가 하는 그런 상상이 자연스럽게 드는 풍경들이었다.
차는 어느새 스플리트 시가지로 들어섰고, 확실히 아드리아해를 바로 접하고 있는 곳이라 기온이 높았다. 거리에는 가로수로 야자나무가 심어져 있었고,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 외투를 걸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게다가 버스에 설치되어 있던 시계 겸 온도계는 20℃에 육박하고 있었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내 캐리어에는 오로지 겨울옷만 담겨 있는데...
우리 버스 기사 마이클은 주차장에 버스를 세웠고, 차에서 내린 우리는 현지 가이드인 남자 하나를 만났다.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인솔자는 그를 길잡이로 세웠고 그 뒤를 따랐다.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으로 출발.
상가 사이로 난 문으로 들어서니 복도가 나타났다. 디아클레시아노바 길이라고 불리는 복도다. 들어서자마자 쿰쿰한 곰팡이 냄새 같은 것들이 나는 걸로 보아 직감적으로 오래된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굳이 그 쿰쿰한 냄새가 아니더라도 로마 제국이 고대부터 존재했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 궁전 또한 오래된 것이리라 짐작도 가능했다. 음... <꽃보다 누나>에서 故 김자옥 여사님께서 춤추시던 곳이라 하면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생존했던 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이전의 군인 황제 시대를 종식시키고 그 혼란을 수습한 황제였다고 한다. 군제와 내˙외정을 비롯한 체제 개혁을 단행했으며, 후에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어 지속될 제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왕권 강화를 위해 기독교와 마니교를 탄압했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보다는 기독교를 박해한 인물로 더 유명하다고... 그는 20년 넘게 제위에 머물며 통치했지만, 재위 기간 너무 많은 일을 해서 지쳐버렸는지 스스로 황제 위를 버리고 은퇴했다. 스스로 물러난 황제는 그 이전과 그 이후 통틀어 그가 유일무이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퇴임 후에 자신의 고향이었던 스팔라툼에 그의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6년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스팔라툼의 궁전이 바로 이곳 스플리트에 남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이다. 295년에 건설이 시작되어 305년에 완성되었으니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의 건물인 셈이고, 그때의 건물이 21세기인 현재까지... 즉 17세기가 지나는 동안 이 궁전은 그 자리에 계속 우뚝 서 있었던 셈이다.
디아클레시아노바 길을 나오자 대성당과 종탑이 나타났다. 성당은 스플리트의 성인인 성 돔니우스 성당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성인 돔니우스에게 헌정된 종탑 때문이다. 돔니우스는 살로메 지방의 주교였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정책 때문에 순교했다. 그를 죽인 자의 궁전에 그에게 바쳐진 종탑이라...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중학교 때 배운 대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고, 덕분에 이곳 스플리트에도 성당이 생겼다.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영묘로 지어진 공간을 이용해서.
이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이야 말로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一紅)이라는 말이 어울릴 곳이다. 인생은 무상하고 권력 또한 그 끝이 있다. 서방세계를 호령하던 디오클레티아누스도 모든 걸 버리고 이곳에 정착한 지 6년 만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하지만 그 역사는 흐르고 또 흘러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하물며 조그마한 동방의 나라의 선출직 권력이야 말해 무엇하랴. 지난 권력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마음이 필요할 것이며 지금의 권력 또한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
궁전은 그 터만 남아 관광객들에게 그 옛날 웅장하고 화려했을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해 준다. 유독 인상적이었던 곳 중 하나였던 홀의 자리. 시간이 맞지 않아 보지 못했지만, 이곳에서는 가끔 아카펠라 공연도 있다고 한다. 어떤 음향 기기도 없이 소리가 울려 웅장할 아카펠라 공연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발길을 재촉했다.
골든게이트라 불리는 북문을 지나면 이곳에서 유명한 그레고리우스 닌 동상을 만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그레고리 닌스키. 10세기 크로아티아의 주교였으며 언어학의 대가였다고 한다. 크로아티아 어학사전을 편찬했다고. 당시 모든 종교 제례가 라틴어로 집전되는 것에 반대하고 자국어로 사목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란다.
그의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건강과 행운을 가져다준다고 하여 이곳을 다녀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엄지발가락을 쓰다듬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다 산화된 청동의 색인 반면 엄지발가락 부분만은 반질반질하게 빛난다.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그래도 안 쓰다듬고 가면 섭섭하니까 모두 줄을 서서 엄지발가락을 쓰다듬었다. 다들 어떤 복을 빌었을까?
단체 일정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각자 흩어져 사진을 찍고, 쇼핑도 하고... 그런 시간들. 궁전 바로 앞에는 항구가 조성되어 있었다. 저 아드리아해 건너에는 이탈리아가 있다고 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 최후의 안식처에서 노을 지는 바다를 보며 제국의 미래를 걱정했을까?
나도 사진을 적당히 찍고 이모와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고대 로마의 도시에 걸려있는 크리스마스 장식과 크리스마스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온난한 기후... 뭔가 어색했다. 내 머릿속 유럽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 그리스나 이탈리아의 느낌에 가까웠다.
스플리트는 가죽 제품과 넥타이가 유명했다. 크로아티아 어디건 넥타이가 유명하지만 특히 스플리트는 다른 곳에 비해 물가가 싸서 더더욱 괜찮아 보였다. 디아클레시아노바 길 안에 위치한 기념품 가게에서 실크 넥타이와 커프스, 행커칩까지 세트로 24 달러 정도? 정확히 액수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후에 갈 자그레브보다는 3분의 1 정도의 가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트러플 제품도 유명한지 한국어로까지 안내문이 적혀있었다.
아, 크로아티아는 유로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의 화폐단위인 쿠나를 사용하는데 쉽사리 환전을 하지 못했다. 환전했다가 다 못 쓰고 이동해야 할까 봐 무서웠다고나 할까...^-^;; 그때의 결정을 아직도 후회한다. 그때 환전해서 아빠랑 남동생 넥타이 세트 하나씩 사다 줄 걸 하고... 결국 넥타이를 못 사서 한이 남은 스플리트...
아 더러 유로를 받는 집이 있긴 하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입구에서 좌측에 위치한 아이스크림 가게는 유로를 받는다. 하나당 1유로. 이모 하나, 나 하나씩 사서 먹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한국에서는 천삼백 원을 줘도 이런 아이스크림 못 먹는다며 둘 다 콘까지 싹싹 다 긁어먹었다.
어느덧 자유시간이 끝날 무렵이 되자 바다 저편으로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머물렀던 그 날은 수평선 위로 산처럼 구름이 보이던 날이었다. 바다와 구름과 노을이 함께 어우러져 장관을 이뤘다.
아, 디아클레시노바 길에서 구경하다가 있었던 일인데 이모가 새똥을 맞았다. 실내라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뭐가 물 같은 게 뚝 떨어져서 차갑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새똥... 아마 새집이 그 지붕 어딘가에 있었던 모양이다. 나중에 발견하고 카메라 렌즈와 이모 머리, 이모 조끼에 묻어있던 새똥을 닦느라 애썼다. 물티슈는 늘 들고 다녀야 하는 필수품이라는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내가 새똥에 맞는 참사가...)
어느새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우리도 떠날 시간. 자유여행으로 스플리트에 온다면 야외 카페테리아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쉽지만 스플리트도 안녕.
이렇게 다섯 번째 날의 일정이 마무리가 되었다. 다음 날은 두브로브니크라는 오래된 도시로 가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가려면 반드시 보스니아 국경을 넘어야 하는데... 그렇게 우리는 보스니아 국경을 넘어 네움이라는 곳에 숙박을 하게 되었다. (보스니아까지 합치면 12박 13일 9개국 여행이 되어버린다... 역시 Crazy Korean Tour!!) 아래 지도를 보면 빨간 점으로 표시된 곳이 바로 네움.
이 날 우리가 묵은 숙소는 Villa Nova. 다른 숙소보다 나는 이 곳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발코니 창문을 열면 아드리아해가 바로 앞에 있고, 밤에도 낮에도 아름다운 곳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단점은 엘리베이터가 없다는 것. 그래도 괜찮다 1유로 팁만 주면 객실까지 포터 서비스가 가능하다.
https://goo.gl/maps/qLadNmzhyfp
http://villa-nova.info/?lang=en
이 날 저녁은 호텔 뷔페식이었는데 엄청 가짓수가 많지는 않았고 적당히 먹을만한 뷔페 정도였다. 채소 인심이 후하지 않은 다른 곳에 비하면 샐러드 바가 있어서 좋았다.
저녁을 먹고 잠들기 전 발코니로 나갔는데 야경이 정말 정말 예뻤다. 내가 유럽에 살면 휴양하러 와서 이 호텔에 한 일주일씩 머물고 싶을 정도로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섯 번째 날은 일정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 멀리까지 열 시간 넘게 비행기 타고 온 보람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언제 또 크로아티아의 대자연을 이리 만끽할 수 있겠는가 싶은 생각도 들었고. 여행 다녀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여행 얘기하면서 강력 추천하는 여행지 또한 크로아티아였다. (물론 내가 제일 좋아했던 곳은 오스트리아와 독일, 그리고 체코였지만... )다른 곳은 내가 얘기하지 않아도 많이들 가지만 크로아티아는 사람들도 잘 모르고 가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잘 없어서 더욱 크로아티아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다음 날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아드리아해의 진주라고 불리는 두브로브니크 투어가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