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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Sep 27. 2019

기도로 생떼를 부리다

영국 여행 중에 겪은 이야기

아마 2월 중순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반년 전에 항공권을 결제해 두고 영국 여행을 준비했다. 아마 늦여름이면 다음 단행본의 초고를 완성했을 것이라, 그때라면 마음 놓고 여행을 다녀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결제를 해 둔 상태였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는 한국을 떠나기 전날까지 원고를 붙잡고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이번 작업에서는 ‘확신’이 없었다. 평소 내가 일하는 스타일은  ‘일에 푹 빠져 미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푹 빠지지 못하는 상태’로 일을 끝내서  ‘확신’이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담당 편집자가 퇴사하게 되면서 담당자가 바뀌는 일까지 벌어졌다. (어째 계약한 후 출간 때까지 한 담당자가 맡은 적이 없다. 게다가 첫 책의 편집자는 출간 일주일 후 퇴사해서 트라우마 같은 게 남아있기도 하고.) 담당 편집자의 퇴사 소식을 듣고 가뜩이나 불편했던 마음이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복도 없는 년’이라며 자조와 냉소 섞인 말을 내뱉었어도 마음이 내내 불편했다. 원고를 메일로 보낸 후 밖에 나가 필요한 것들을 사 오고 몇 시간 동안 짐을 쌌다. 


출국하는 날이 밝았다. 음식물이라고는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먹으면 공항으로 가는 동안 더 안 좋을 것 같아서) 메스꺼운 속을 달래기 위해 위 벽을 보호하는 현탁액 한 포를 까서 먹고 공항 리무진 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인천 공항으로 향하는 동안도 속이 메스꺼운 게 심상치 않았다. 20년 가까이 신경성 위염과 식도염을 달고 살아서 잘 안다. 이건 위염 증상이다. 쉽사리 낫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통증은 최소 일주일은 죽을 먹고 먹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어쩌면 여행 내내 음식 때문에, 통증 때문에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인천 공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세 시간 뒤면 나를 태운 비행기는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열한 시간의 비행을 시작할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향한 곳은 약국이었다. 수하물로 부칠 가방에 아침에 먹고 나온 약이 들어있었지만 기껏 싸 놓은 짐을 다시 풀고 싶지 않았고, 혹시나 싶은 마음에 비슷한 약을 한 상자 더 사서 가려는 의도였다. 같은 약은 아니었지만 약사님의 추천으로 비슷한 약을 샀다. 사자마자 또 한 포를 따서 먹고 비행기를 탔다. 비행을 하는 열한 시간 동안도 조심했다. 다니던 한의원에서 원장님이 주신 소화제 환약을 기내식 섭취 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버텼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만신창이였다. 속은 속대로 메스껍고, 기체의 진동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다는 날개 바로 위 창가 자리에서 허리를 열 시간 넘게 펴지 못해서 5년 전 다친 허리 근육 부분을 중심으로 엄청난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도착한 시각이 저녁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릿속에는 오로지 ‘씻고’, ‘눕자’만 각인되어 있었다. 런던 숙소에 첫 번째 체크인을 했다. 샤워를 한 후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여행 이틀 차, 런던에서 에딘버러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기차를 타고 에딘버러로 가 3박 4일을 보낸 후,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런던 시내와 런던 근교를 돌아다니며 15박 16일을 보낸 후 귀국하는 일정이었다. 둘째 날이라고 해서 컨디션이 크게 좋아지지 않았다. 허리 통증이 심해서 붙이는 파스를 챙겨 오지 않은 과거의 나를 탓했으며, 런던 숙소에서 차려준 아침밥 먹은 것도 위에서 부대끼고 있었다. 네 시간 반 동안 옆 자리 사람들이 몇이나 바뀌었지만 컨디션은 악화일로... 기차 안에서 읽으려 했던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점심으로 먹겠다고 사 온 샌드위치와 과일에는 손도 댈 수가 없었다. 


서러웠다. 여기 오는 것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아프려거든 서울 집에서나 부모님 계신 고향집에서 아플 것이지 이역만리 타향에서 아파 힘들어할 일은 무엇인가. 돈은 돈대로 쓰고, 구경은 구경대로 못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고 나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현타가 왔다. 그 순간에도 기도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여행은 내가 하고자 해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그냥 나도 모르게 원망 섞인 기도가 튀어나왔다. 


“여기까지 오게 만드셨으면 빨리 저 낫게 해 주세요. 비행기 값싼 거, 그것보다 더 싼 거 예매해서 오게 하신 거 당신이시니, 여기까지 혼자 오게 만드신 거 주님이시니 빨리 낫게 해 주세요. 저 여기까지 와서 아프기 싫어요. 아프게 하실 거면 한국에서 아프게 하실 것이지 왜 지구 반대편인 이 먼 곳까지 오게 하셔서 아프게 만드세요? 저 아프기 싫어요. 빨리 책임지세요. 빨리 낫게 해 주세요.”


나도 모르게 시작된 기도는 눈물을 불러왔다. 기차 객실 안에 동양인이라고는 나뿐이라 안 그래도 눈에 잘 띄는데, 그런 젊은 동양 여자가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쉬운 모습,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졌다. 그랬다. 런던 킹스크로스에서 에딘버러 웨이벌리 역으로 향하던 기차 안에서, 나는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채 울고 있었다. 달링턴 역에서 기도를 시작하면서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더럼 역을 지나 뉴캐슬 역까지 이동하던 한 시간 반 남짓 계속되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이역만리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아파 서러워서 그랬는지, 아니면 여행을 오기 이전부터 울고 싶었는데 약한 모습을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참아왔던 것이 거기서 터진 건지... 


뉴캐슬 역에서 축구 팬으로 추정되는 남자들 그룹 하나가 맥주를 잔뜩 사들고 기차에 타 객실 분위기를 떠들썩하기 만들기 전까지... 계속된 눈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한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었는지, 한 시간 반 남짓하는 그 시간 동안 고요히 흘린 눈물 때문에 마음이 조금 진정된 덕분이었는지... 거짓말처럼 속이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메스꺼움이 많이 사라진 상태에서 에딘버러 역에 도착했고, 에딘버러 숙소 사장님이 차려주신 한식으로 저녁을 먹은 후 다음 날부터 위에서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사장님 음식 솜씨가 워낙 좋아서, 특히 국을 정말 맛있고 깔끔하게 끓이셔서 내 상태에 많이 도움이 되었다. 여행 셋째 날은 음식을 좀 조심하면서 보냈지만, 밖에서 외식도 했고. 넷째 날부터는 음식을 크게 조심하지 않으며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여행을 끝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다.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한 것은...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 속이 편해지기 시작한 것을 느낀 것도 있지만, 내가 느낀 그 통증은 절대 이삼일 만에 나아질 통증이 아니었다. 최소 일주일에서 열흘은 갈 통증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20여 년을 달고 산 질환이라 너무 잘 안다. 이미 염증이 생겨서 나타난 통증이었는데 소염제도 먹지 않은 채 나아질 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그런데 병원도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고 통증이 사라졌고, 여행을 다녀온 지금도 다른 곳이 아프면 아팠지 (허리...-_-) 위 쪽은 멀쩡해서 음식도 잘 먹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오복음 7장 11-13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7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0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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