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공감 능력자 (4)
“우서연 원장님 집에 가자!”
병원 출입문을 발로 뻥 하고 차고 들어오는 기세의 수하. 분명 사무실 쉬는 월요일이라 집에 처박혀 있었어야 할 그녀가 병원에 들이닥치자 서연과 소화 모두 벙 찌고 말았다.
“뭐야, 오늘은 안 쉬었어?”
“쉬었지. 쉬었지만 외출했었어.”
“... 외출...?”
집순이가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어 잠시 의아했던 서연은 이내 곧 짚이는 데가 있는지 입을 한 일(一) 자로 다물었다.
“얼릉 집에 가서 밥 먹자!”
“... 그래 그러자...”
쾌활하게 서연을 이끄는 수하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우울이 비쳤다. 마치 수하가 어딜 다녀왔는지 아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예상이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란 단정과 함께...
잠시 후, 서연의 집 부엌 식탁에는 보자기에 싸인 밀폐용기가 한 상 가득 놓였다. 수하의 짓이었다.
“어머니한테 다녀왔어 오랜만에. 뭐 여쭤 볼 것도 있고 말야... 어머니가 반찬 싸 주셨어 네 몫이랑 내 몫이랑 따로따로.”
웃으며 밀폐용기에서 반찬들을 접시에 조금씩 소분해 담으며 수하는 명랑하게 웃었다. 서연은 그런 수하를 보며 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서연의 어머니였지만 수하에게도 어머니였다. 신어머니. 친딸인 서연보다 신딸인 수하가 더 모녀 사이 같이 살가웠다. 열 살 전까지만 해도 모녀 사이는 여느 다른 모녀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가 신병을 이기지 못해 결국 신내림을 받던 그날 이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가정의 평범한 행복을 누리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자신을 버려두고 떠났고 어머니는 묘하게 그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거는 김치고, 이건 너 좋아한다고 어머니가 명인이 만드는 걸로 주문해 두셨다는 색소 없는 명란젓! 이거는 샐러리 장아찌. 저번에 너 잘 먹더라고 얘기해 드렸더니 그새 또 담아두셨다지 뭐야! 나도 맛있게 먹어서 어머니가 이번에 엄청 많이 담으셨대. 그리고 이건 수박 흰 부분으로 담은 장아찌. 이런 것도 있더라며 신기해서 담아보셨다 하시더라.”
장조림, 오징어채 볶음, 멸치 볶음, 기름을 다 걷어내고 푹 고아 만든 새하얀 곰탕 얼린 것, 김치며 장아찌며 그야말로 엄마 밥반찬 그대로였다. 하지만 서연에게는 그리 큰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성인이 되어 대학에 들어가며 같은 서울에 살았지만 어머니가 얻어준 오피스텔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 전에도 모녀간에 묘한 거리감이 있어 엄마의 부재는 딱히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기본적으로 식욕이란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아무도 옆에서 챙기지 않으면 삼사일 굶는 것은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나마 수하가 옆에서 챙겨 먹여서 하루에 한두 끼는 제대로 먹었지 수하가 아니었으면 영양실조 고독사 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가져오느라 고생했네.”
“뭘, 차에 싣고 왔는데 고생은. 한동안 외식 안 해도 되겠다. 너무 좋아!”
수하가 좋아하기에, 서연도 같이 빙긋 웃었다. 데면데면한 모녀지간은 애틋하지도 않았지만 제 곁의 수하가 좋아하기에 같이 웃어준 것이다. 어릴 적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던 수하였다. 진짜 모녀지간은 데면데면해도 내 자매 같이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에게 엄마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이 내 엄마라도 있어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부엌 한켠 싱크대 가스 쿡탑 위엔 냉동해서 가져온 뽀얀 곰국이 끓어 올랐고, 수하는 언제 서연의 집에 들러 전기밥솥에 밥까지 안쳐놓았는지 어느새 밥공기 둘과 밥주걱을 들고 밥을 퍼 식탁 위에 하나씩 올려놓았다. 그리고 밀폐용기들에서 반찬들을 꺼내 접시에 덜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부분의 저녁 식사는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지만 가끔 수하가 이렇게 엄마 반찬을 가져와 차려먹는 날은 드물었다. 서연이야 친모녀 지간이더라도 1년에 한 번 얼굴 볼까 말까 한 사이고, 수하도 분기별로 한번 방문할 정도니...
“... 생일 상 같네...”
무심코 어릴 적에 받았던 생일상을 떠올린 서연. 자신이 좋아하는 밥반찬들로만 차려진 식탁 위 음식들을 보며 의도치 않았던 감상에 잠시 휩싸였다. 잠시 아무 걱정 없었던 ‘그날’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도 살짝 들었다.
“먹자!”
수하가 수저까지 식탁에 올려놓고 활짝 웃었다. 그녀의 웃음에 서연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리고 두 사람 다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집에 난방을 돌리지 않았지만 왠지 공기가 훈훈해지는 느낌을 느끼면서...
식사가 끝나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수하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서연의 모친이자, 자신의 신모(神母) 은숙에게 전화를 건 것이었다.
- 그래 수하야, 잘 들어갔니?
- 네 어머니, 잘 도착해서 어머니가 챙겨주신 반찬으로 서연이랑 같이 저녁 해 먹었어요. 잘 먹을게요! 서연이도 어머니 반찬 잘 먹더라고요.
- 그래 둘이 끼니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으렴. 다른 게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건강만큼 제일 중요한 건 없으니까.
- 네 어머니, 걱정 말고 지내세요 제가 서연이 잘 챙길게요. 어머니도 건강 잘 챙기시고요.
- 그래, 고맙구나.
수하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여의고 할머니 손에 자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그녀에게 친척을 비롯한 혈육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남겨진 그녀가 마음으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신을 받아준 신어머니 은숙과 그녀의 딸인 서연뿐이었다. 그래서 수하는 서연을 자매로 생각했고, 은숙을 어머니처럼 생각했다. 신병이 발병해 학교에서 입이 터졌을 때 당황하지 않고 제 어머니께 데려가 준 서연에게 고마웠고, 자신을 받아준 은숙에게도 감사했다. 두 모녀는 그녀에게 은인인 셈이었다. ‘신 내림을 받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안타까워하는 은숙과는 달리 내림을 받아, 손님들 점사를 봐주며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시기까지 약값이며 치료비를 비롯한 돈 걱정을 하지 않아, 은숙과 서연이라는 새로운 가족이 생겨 다행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중간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혹시나 신줄이 딸에게 내려갈까 거리를 두는 은숙과, 그런 은숙의 태도 때문에 멀어지는 서연의 중간에서 역할들을 해왔다. 소소하게는 반찬을 가져오는 것부터, 두 사람의 메신저 역할을 해 온 수하. 두 사람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해 왔으므로 자신이 맡아해 온 일들은 기꺼이 할 수 있었다.
- 어머니 또 곧 찾아뵐게요. 연락도 또 드릴게요.
수하의 전화를 끊은 은숙은 휴대전화의 액정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친딸인 서연과 신딸인 수하가 몇 년 전 같이 간 여행에서 찍어 보내준 사진이 배경화면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자신의 두 딸. 목숨을 내어 놓아도 아깝지 않을 딸 서연, 그리고 친딸보다 더 친딸 노릇을 하는 수하. 두 사람 모두 그녀에겐 소중한 존재였다. 원하지 않았던 삶이었지만, 두 딸이 있기에 살만한 인생이라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