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체험 영화 <덩케르크>
그토록 기다려왔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신작 <덩케르크>를 만나고 왔습니다. 1차 관람 때는 어쩌다 운이 좋아 용산 아이맥스 가장 중간 좌석에서 관람했는데... 한번 더 관람하고 리뷰를 남기고 싶었지만, 용산 아이맥스 티켓팅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쉽지 않네요. (건강도 좋지 않아 무리하지 않기도 해야 하지만요.)
많은 이들이 덩케르크를 보고 와서 ‘영화적 재미를 거세한 영화’ 혹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로운 역사’ 라며 양 극단으로 갈린 평을 내놓습니다. 이 영화는 일반적인 전쟁영화와는 결이 무척 다르기 때문에 이런 평가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반응이었죠. 일단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주된 서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요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영화 전체를 끌어가는 다른 전쟁영화와는 달리 사건을 끌고 가는 메인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죠. 대신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시선 혹은 등장하지 않지만 등장인물 사이의 가상의 누군가의 시선으로 카메라 앵글을 사용하곤 합니다. 관객이 한 등장인물, 혹은 등장인물 사이의 가상의 누군가가 되어 ‘전쟁을 체험할 수 있는’ 영화인 셈입니다.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전쟁판 그래비티’라고 해야 할까요?
진짜 전쟁 상황. 생사가 바로 코 앞에서 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고, 포탄이 내 머리 위에서 떨어지며, 살아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당장 몇 분 뒤도 보장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많은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든 에너지를 아껴야 하며, 생존을 위해 마지막 하나의 표피세포까지도 곤두세워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요?
그러다 보니 놀란 감독은 전쟁 체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적 재미인 서사와 대사를 과감히 버리고 극사실주의로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아닌 다큐’라는 평도 들을 수밖에 없었고요. 하지만 다큐 조차도 기-승-전-결이라는 스토리 텔링이 들어갑니다. 그러니 다큐라는 장르보다는 극 사실주의 전쟁 영화 혹은 전쟁 체험 영화라고 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아이맥스 스크린으로 보는 것입니다. 놀란 감독 자신이 열혈 아이맥스 빠여서 이 영화 전체 러닝타임 106분 중 79분을 아이맥스 필름으로 찍었기 때문에 봐야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체험 영화라는 취지에 맞추려면 4D나 다른 상영 포맷보다는 영화에 몰입도를 높여주는 아이맥스가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상영관의 앞에서 다섯 번째 줄, 여섯 번째 줄 정도라면 영화 속에 관객이 들어간 듯한 느낌이 들겠죠. 실제로 아이맥스관 앞 쪽에서 관람한 몇몇 관객은 항공 전투 씬에서 멀미를 느낄 정도로 몰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이전작과는 달리, 이름난 배우들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큰 특징이 있습니다. 심지어 주요 배역으로 캐스팅된 배우들이 맡은 캐릭터의 이름 조차 잘 나오지 않습니다. 대사와 함께 등장인물의 이름조차 잘 부르지 않는다는 것도 그렇고, 누가 정확히 이 이야기를 끌고 가는 원톱 주연인지 조차 가늠하기 힘들게 그려져 있는 것 자체가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드러나게 합니다. 이는 감독의 전작 중 하나인 <다크 나이트>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도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영웅은 누구나 될 수 있지.”, “어린아이의 어깨에 코트를 덮어주며 세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간단하면서도 확실히 알려줬던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지.” 전작들은 대사로 처리한 감독은 이번에는 시각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고립된 수많은 영국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낚싯배와 요트들 그리고 그 배들을 몰아 달려온 수많은 시민들의 힘으로 덩케르크 철수 작전이 성공한 것을 보여 줌으로써, 감독은 어떤 히어로 하나가 아닌 평범한 일반인 모두의 힘을 합쳐 어려운 시기를 이겨낼 수 있다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바라본다면 이 영화는 영국판 국뽕 영화가 아닙니다. 놀란 감독이 국뽕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면 독일군을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 반동 인물)로 설정하고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을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 주인공)로 설정해서 전형적인 서사 구조를 따라가는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 내내 비행기를 제외하고 독일군으로 보이는 인물은 보이지 않고, 피가 튀고 살이 튀는 장면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독은 철저히 영국군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되, 자칫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에 ‘덩케르크 해변가에서의 일주일’, ‘해상에서의 하루’, 그리고 ‘덩케르크 상공에서의 한 시간’, 이 세 가지 플롯을 교차시키고 중첩시켰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기 중 하나죠. 감독은 이 방식을 통해 영화의 긴장감을 계속 지속시킬 수 있었고, 관객의 몰입을 유지시켜줄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덩케르크>는 일반적인 전쟁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한 번쯤 볼만한 그리고 경험할만한 영화임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본 적이 없는 전쟁 체험 영화라는 점에서 꼭 한 번 아이맥스관에서 관람하시라고 추천해 드립니다.
덩케르크
별점 : ★★★★ (4개 / 5개 만점)
한 줄 평 : 평범한 사람들이 일궈낸 기적.
그리고 놀란이 일궈낸 관람이 아닌 체험이라는 또 다른 영화 관람 장르의 개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