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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Aug 18. 2017

폴란드의 아이덴티티, 쇼팽

그리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

비 오는 광복절 오전에 들은 쇼팽의 전주곡 ‘빗방울’에 이어, 오늘도 쇼팽의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젊은 날의 쇼팽은 무척 애국심이 고취되어 있었던 청년이었다고 합니다. 쇼팽이 음악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하여 바르샤바에서 빈으로 떠난 지 일주일 되던 날, 그의 고향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폴란드 독립을 위해 혁명이 발발했습니다. 러시아의 쨔르는 바르샤바에 군대를 투입시켰고, 혁명군은 어려움에 처했죠. 쇼팽은 폴란드의 아버지에게 돌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싸우겠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부친은 ‘네가 음악을 열심히 하는 것도 조국을 위한 것’이라며 돌아오지 말라고 답장을 써서 보냈습니다. 결국 쇼팽은 귀국의 뜻을 꺾고 파리로 이주했는데, 그는 결국 서른아홉 해의 짧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쇼팽은 파리에서 사망했고, 그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바르샤바로 옮겨졌습니다. 삶이 끝나고 나서야 고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셈이죠.


쇼팽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 하나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 <피아니스트>. 러닝타임 내내 쇼팽의 음악들이 흐르는 이 영화는 폴란드 피아니스트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전쟁으로 인해 한 개인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게 망가지는지를 미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숨을 죽이며 보게 되는 장면은 독일군 장교 빌헬름 호젠펠트 대위 앞에서 스필만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일 텐데요... 이 장면에서 스필만이 연주한 곡은 쇼팽의 <발라드 1번>입니다.


https://youtu.be/jHfQCfUTlXE

영화 <피아니스트> 중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실제로 스필만이 호젠펠트 앞에서 연주한 곡은 쇼팽의 <녹턴 C샵 단조> 였다는 건 영화와 다르지만, 생사여탈권을 가진 사람 앞에서 생애 마지막일지도 모를 피아노 연주를 담은 장면에서는 고요한 도입부와 잔잔하게 흐르다가 격정적인 절정부를 가진 <발라드 1번>이 실제 연주했던 녹턴보다 더 어울리는 음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엉엉 울며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쇼팽은 폴란드의 아이덴티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핀란드 독립의 씨앗이 되었던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와 같이 음악과 민족이 하나로 연결되는 케이스는 아니지만, 폴란드의 역사는 쇼팽의 음악과도 참 많이 닮아 있거든요. 유럽의 가장 동쪽 끝에 위치해서 걸핏하면 주변 강대국들의 침략을 받아 그들의 영토에 편입되어 왔고, 전쟁에 휩쓸리지 않은 기간이 극히 짧은 국가. 그러니 조용하고 우울한 색채를 가진 쇼팽의 음악과 폴란드는 떼어 놓으래야 떼어 놓을 수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쇼팽의 음악이 잘 어울리는 가을이 찾아오고 있는 늦여름의 금요일 오후, 쇼팽의 <발라드 1번>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알렉세이 보로딘의 연주로 들려드립니다.


https://youtu.be/lZNvkL2 yMVw

알렉세이 보로딘 - 쇼팽 <발라드 1번 G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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