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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Oct 16. 2017

당신은 누구의 의지대로 살고 있나요?

Josh Grogan - Panis Angelicus (생명의 양식)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글이오니 종교색이 포함된 글에 불편함을 느끼실 것 같은 분들은 읽지 않으시기를 권합니다.



독자분들의 호불호가 탈 것으로 생각해 개인적인 종교색을 글에 드러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드러내 볼까 합니다. 이 글은 음악 소개 글이기도 하겠지만 제 종교적 소회가 좀 더 짙게 담기게 될 것 같아 먼저 양해를 구합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세례를 받은 지도 벌써 만으로 3년이 지났네요. 그 전에는 신보다는 저 자신을 좀 더 많이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노력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믿었고 저도 노력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리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제가 목표한 만큼을 해내지 못하면 저 자신에게 스스로 가혹해졌고 마음에 병을 얻었습니다.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아마 무의식이 생존을 위해 기억을 덮어버린 게 아닌가 싶어요.) 회사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얘기도 자주 하고, 가장 친한 친구에게는  어느 날 갑자기 전화해 몇십 분간 아무런 얘기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다고 하기도 하고요.


제가 처음 성당의 문턱을 넘을 결심을 한 것은 하나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갈망하여 움켜쥐면 모래알처럼 내게서 빠져나갔고, 그래서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하고 손을 펴서 버리면 제 손에 들어오는 것을 몇 차례나 겪고 나서였죠.


‘내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만약 신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신의 뜻대로 사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처음 성당의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직후부터 청년부 활동을 하며 주일 청년 미사에서 독서와 해설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강렬한 경험들을 몇 차례 하며 교리 신청 때만 하더라도 믿지 않았던 신의 존재를 확실히 믿게 되었고요.






저는 지금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잘츠부르크로 향하는 기차 안에 앉아있습니다. 이 나라에 도착한 지도 벌써 닷새째가 되었네요. 빈 안에는 여러 명소가 많은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랜드마크를 꼽는다면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궁전인 쇤브룬 궁전과 성 슈테판 대성당 둘을 가장 먼저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빈을 떠나기 전 성 슈테판 성당의 아침 첫 미사에 참석해 보니, 그 시간대 미사는 독일어로 진행되는 미사였습니다. 영어라도 100%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독어는 인사와 사랑한단 말만 알아듣는 수준이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1도 못 알아듣겠더라고요. 그래서 한국에서 쓰는 매일 미사 앱을 켜 오늘의 독서와 복음 내용을 먼저 숙지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어 모든 것을 베푸시고 채워주신다는 것, 주님의 초대와 선택된 이들에 대해,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 중 그 초대를 거부한 이들을 비유하신 예수님 말씀이었습니다. (이사야 25, 6-10ㄱ / 필리피서 4, 12-14. 19-20 / 마태오 22, 1-14)


제1독서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제2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4<또는 22,1-10>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빈에 도착해 순간순간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고 또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의 복음이었죠. 작년에 다녀간 이곳에 1년 만에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 이 또한 내게 베풀어주신 것이고 보내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빈 여행 둘째 날에 겪은 일을 비췄을 때도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채워주신다는 경험을 했거든요. 그런데 독서 내용도 복음 내용도 같은 맥락입니다. 제 세례 신부님이신 불량 신부님이 카톡으로 전하신 오늘의 ‘말씀 한 모금’ 마지막 구절도 제가 성당을 처음 찾았을 때의 그 뜻과 일치했습니다.


연중 제28주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왕자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그 초대를 거절한 비유입니다. 먼저 복음 본문을 꼼꼼하게 읽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여간 임금의 초대인데 사람들이 거절했다?

이럴 수 있을 까요. 어릴 적에 골목에서 열심히 놀았죠. 딱지치기, 술래잡기, 땅따먹기-놀 것은 많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노는 것 잘 보세요. 그러면요 아주 온 존재를 다 바쳐서 놉니다. 흙투성이가 되도록 놀죠. 그런데요 저녁 되어 해가 뉘엿뉘엿 지면 어두워져서 이제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이에요. 엄마가 아무개야, 이제 그만 놀고 와서 씻고 저녁 먹어. 그러면 네 엄마하고 한 번에 들어간 사람. 없습니다. 몇 번에 들어가죠. 아니요. 말로 해서 들어간 사람 없어요. 기어이 엄마가 나와서 질질 끌려가죠. 왜요? 그 시절에는 엄마가 차려주는 따스한 밥 한 공기, 아웃국의 가치를 몰라요. 그 녀석에게는 지땅도 아니면서 내가 더 많이 차지해야 하는데 그 땅따먹기가 그렇게 소중하단 말이죠. 걔한테는 그것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왕이 베푼 혼인잔치에 초대받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일상이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초대의 가치를 모르는 것이죠. 가치에 눈뜨지 않는 사람은 죽어다 깨어나도 그 가치를 모르니까 밭으러 가고 장사하러 갑니다. 돈 벌러 갑니다. 임금의 초대보다는 나의 삶, 나의 삶이 우선적입니다. 잔치는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이들은 일차로 초대장 받았을 때는 가겠노라고 대답했던 이들입니다. 처음부터 가지 않겠다 했으면 이렇게까지 주선자 호스트인 임금이 화를 낼 리 없어요. 가겠노라 철석같이 약속해놓고 막상 당일에는 안 오는 이들, 한둘이 아니더라는 것이고 잔치를 망치게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긴급하게 임금이 조치를 취합니다. 길거리에 나가 누구나 다 데리고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간신히 잔치 자리를 채웠어요. 그런데요 왕이 마지막 점검하러 들어와서 모인 사람들 보고 흐뭇해하는데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혼인잔치에 온 사람들은 착한 사람이 아니에요.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다 데리고 왔습니다. 주인이 일방적으로 초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복을 입혔습니다. 중동 지역 문화상 이 정도의 혼인잔치 로열 웨딩은 손님들에게 답례품으로 예복 한 벌씩 선사하는 풍습이 있답니다. 그러니까 거리에서 불려 온 이 사람들은요 파티장에 입장하기 전에 입구에 죽 걸려있는 옷 중에서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 입고 들어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딱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어요. 그는 무슨 옷을 입고 있었을까요. 벌거벗고 있진 않았을 것이죠. 그럼 무슨 옷? 자기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옷을 입고 있는가 주인이 준비한 예복을 입고 있는가 이 차이죠. 마태오 복음은 자기 옷을 입고 사느냐 주인이 입혀준 옷을 입고 사는가, 이것이 신앙의 관건이란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주님을 모를 때는 신앙생활하는 것 같지만 계속 자기 옷을 걸쳐 입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워서 주님이 주신 옷을 입는 투쟁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스타일이 아니라 주님 스타일로의 전환. 초대된 이들이 입은 옷은요 자기가 준비한 예복이 아니라 그 자리에는 주인이 준비한 옷 그 예복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이 선택된 이들이 누구입니까? 자기가 만든 옷을 입고 만든 이가 아니라 자격은 없지만 주인이 준비한 옷을 입고 초대에 응한 사람이죠. 그가 행복한 사람이에요.  우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신부로 초대되어 온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질문 하는 것이죠.

이제는 내 힘으로 살래 네 힘으로 살래? 끊임없이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발버둥 치는 인생이냐 아니면 하느님 안에 삶을 던져서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행복으로 넘치게 살 것이냐. 어느 쪽 할래-이런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불량 신부


미사 시작 전부터 눈물을 찔찔 짜기 시작해, 미사가 진행되는 내내 울다 그치기를 반복했습니다. 어찌나 훌쩍였는지 옆에 앉아 계시던 오스트리안 할머니께서 휴대용 티슈 한 팩을 건네주셨고, 미사가 끝난 후에는 악수를 청하시고 나머지 한 손으로 제 어깨를 토닥여주시더군요. 그 후 마음이 벅차오르고 든든해진 상태로 빈을 떠났습니다.

잘츠부르크로 가는 기차를 타고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오스트리아의 시골 마을들을 감상하며 듣던 음악 중, 오늘 제게 와 닿았던 모든 것과 일맥상통하는 음악이 나오자 또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바로 팝페라 가수 조쉬 그로반이 부른 ‘파니스 안젤리쿠스(Panis Angelicus, 생명의 양식)’입니다.

제가 신앙을 갖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살 수 있었을까요? 그 이전보다 더 치열하게 쫓기며 자신을 스스로 더더욱 극한에 몰아넣다 어찌 되었을까 상상해보니 다시는 영혼이 빈곤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육체와 금전적으로 조금 힘들어도 마음이 풍요로워진 지금의 제 모습이 더 마음에 들거든요.



https://youtu.be/AM81uMmnT48



1.
Panis angelicus fit panis hominum
천사의 양식이 인간의 양식이 되며
Dat panis coelicus figuris terminum
천상 양식은 상징에 종지부를 긋는도다
O res mirabilis manducat Dominum
오 기묘한 일이여, 가난하고 비천한 종이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주님을 먹는도다
Pauper, Pauper, servus, et humilis
주님을 먹는도다

2.
Te trina Deitas unaque poscimus,
삼위일체이신 천주여 당신께 간구하옵나니
Sic nos tu visita, sicut te colimus:
당신을 공경하는 우리를 돌보시어 우리가 믿는
Per tuas semitas duc nos quo tendimus,
길을 걸어 당신이 계시옵는 광명에 이르도록
Ad lucem quam inhabitas.
우리를 인도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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