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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하 Nov 23. 2018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독립을 향한 볼레로

영화 <밀정> 중에서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본 글은 2019년 가을 출간될 《이지 클래식 2(가제)》에 일부 수정을 거쳐 수록될 예정입니다.❞


2016년 9월, 한국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감독 중 하나였던 김지운 감독이 꽤 오랜만에  국내 팬들 앞에 신작을 선보였습니다. 한동안 할리우드에 진출해 그곳의 스튜디오와 시스템으로 작업하던 김지운 감독이 오랜만에 한국 팬들에게 새 작품으로 인사를 한 셈이었죠. 제목은 <밀정 (The age of shadows)>. 국내 영화 최초로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이자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가 제작 투자와 배급 일체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영화는 역사 속에 실존하는 사건 ‘황옥 경부 폭탄사건’을 모티브로 하여,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을 하던 조직 의열단과 의열단의 리더 김우진(공유 분), 이중 스파이였던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 이정출(송강호 분)의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1920년대, 조선인 출신인 일본 경찰 이정출은 상부의 지시를 받아 무장독립 투장 단체인 의열단의 수사를 맡게 되고, 의열단의 리더 격으로 보이는 김우진에게 접근합니다. 이정출은 김우진을 통해 어떻게든 의열단 내부에 침투해서 의열단 단장인 정채산(이병헌 분)을 잡으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김우진은 그런 이정출을 어떻게든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이중 스파이로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죠. 극과 극의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은 처음 서로에게 접근했던 목적과 달리 인간 대 인간으로 정을 나누게 됩니다. 이정출은 같은 조선인이라는 공통분모도 있었지만, 이전 임시정부 활동 시절 동료였던 김장옥(박희순 분)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있었는지 의열단의 거사를, 의열단원들이 거사를 위해 폭탄을 옮기는 것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이미 의열단 내부에 침투한 이중간첩이 조직의 기밀과 작전을 경무국 하시모토(엄태구 분)에게 노출시키고 있었고, 작전에 가담한 의열단원 모두는 검거되거나 죽임을 당하며 작전은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김우진과 이정출 모두 실패한 거사로 인해 일본 법정에 서게 되는데, 이정출은 일본 경찰로서 세작 역할로 가담했을 뿐 의열단원들과 동지도, 친구도 아니라며 울음을 터뜨립니다. 결국 그는 홀로 교도소를 출소하게 되었고, 이후 경찰직에서도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김우진과 이정출의 작전. 둘 중 하나는 살아남아 거사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약속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경찰직에서 물러난 이정출에게 비서는 일본 고위 인사들이 모여 파티를 연다는 정보를 알려주고, 이정출은 자기 집 마룻바닥 아래 보관해둔 폭탄을 파티장 곳곳에 설치합니다. 


이때 흘러나오는 음악이 바로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의 ‘볼레로’. 원래는 스페인 춤곡의 일종인 리듬과 박자를 이야기하는 용어이지만 라벨은 이 춤곡의 형식을 빌려 10분이 넘는(라벨의 악보 그대로 연주하면 약 17분 정도, 빠르게 연주하면 14분 정도) 단악장의 관현악곡으로 재탄생시켰습니다. 클래식이라 일컫는 고전음악들은 하나의 주제 멜로디를 조금씩 변주시켜 구성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라벨의 ‘볼레로’는 거의 마지막 1분 정도를 제외하면 주제 멜로디를 변주 없이 똑같이 연주하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대신 처음 시작할 때는 목관 악기의 아주 여린 음으로 연주를 시작해, 점점 현악기들과 금관악기들이 가세하며 크레셴도(점점 세게)로 연주하는 방식으로 서서히 증폭되는 구성이라는 게 독특합니다. 


김지운 감독은 라벨의 ‘볼레로’를 비롯, 영화에 쓴 음악들을 사용한 이유를 “만약 우리가 주권을 뺏기지 않았다면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즐기며 향유했을 노래.”라고 설명했지만 저는 다르게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특히 ‘볼레로’의 경우에는 말이죠. 영화 말미에 이정출은 김장옥의 죽음에 일조한 부자 영감을 척살하고 영감의 재산을 독립군자금으로 넘겨주면서 연락책 선길(권수현 분)에게서 의열단장 정채산의 전언을 전달받습니다. 그 전언은 이런 내용이었죠. ‘우리는 실패해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실패가 쌓여 그 실패를 딛고서 앞으로 전진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야 합니다’. 많은 독립투사들이 영화 속 김우진과 그 동료들처럼 자신의 꽃 같은 젊음과 목숨을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싸웠습니다.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계속해서 노력했고, 그 희생으로 말미암아 결국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제가 느끼기엔 순국선열들의 독립운동은 같은 모습으로 꾸준히 계속 이어지는 라벨의 ‘볼레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정채산의 전언, 실패해도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 또한 라벨의 ‘볼레로’와 닮아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화 <밀정>의 부제를 이렇게 달고 싶습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독립을 향한 볼레로’ 라고... 


https://youtu.be/mhhkGyJ092E

구스타보 두다멜(지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라벨 : 볼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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