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베를린 필하모닉 내한공연 관람 후기
유난히 더웠던 올해 여름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내한공연 소식이 들려왔고, 협연자가 누군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매를 했던 기억이 나네요. (물론 저의 가벼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하여 가장 싼 좌석으로 말이죠...)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6년간 호흡을 맞춰왔던 베를린 필과 사이먼 래틀 경의 협연을 마지막으로 제 생 눈으로 보고 생 귀로 들을 수 있는 잠정적 마지막 기회였거든요. 이번 시즌은 래틀 경이 베를린 필과 함께 하는 마지막 시즌이니 말이죠. 다음 시즌부터 새로운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합류하면, 래틀 경이 말한 대로 새로운 색깔이 베를린 필에 입혀질 겁니다. 하지만 동료로서, 파트너로서의 합을 맞춰가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겠죠. 역대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들이 그래 왔듯, 여느 오케스트라와 새 지휘자가 그렇듯... 그들 역시 그 과정을 거쳐갈 겁니다. 그러니 더더욱 래틀 체제에서 음악적으로 완숙한 베를린 필의 (실질적으로 마지막) 연주를 실제로 듣고 싶었고, 래틀 경의 음악 해석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일찌감치 얼리버드 예매로 표를 사 둔 후, 잊고 지내고 있었습니다.
일요일 오후 다섯 시, 월요일 저녁 여덟 시... 두 공연 중 하나만 참석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일요일을 고른 이유는 브람스 교향곡 4번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로 듣고파서였습니다. 피아노 협주곡의 협연자가 랑랑이라는 것은 제게 선택의 이유가 되진 못했고요. 하지만 제가 공연에 대하여 까맣게 잊고 지내는 동안 랑랑의 왼팔 건초염 증상으로 인해 협연자가 바뀌게 되었습니다. 조성진... (네, 바로 한국인 최초로 쇼팽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젊은 피아니스트 말입니다.) 협연자가 바뀜에 따라 피아노 협주곡도 바뀌었습니다.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에서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말이죠.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의 청취자분들이나, 제 책의 독자분들 중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클래식 연주자들 중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 연주자들을 좋아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 더 이상 함께하고 있지 않으신 분들의 연주도 좋아하고요. 예프게니 키신이나 랑랑 같은 젊은 연주자, 리윈디와 율리아나 아브제예바와 같은 조성진의 쇼팽 콩쿠르 선배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는 그들보다는 세상을 떠난 글렌 굴드, 알프레드 브란델, 빌헬름 켐프, 에밀 길렐스와 같은 연주자들, 다니엘 바렌보임이나 마우리치오 폴리니, 백건우 님과 같은 연세 지긋하신 분들의 연주를 더 선호합니다. 이유는 곡의 해석 때문인데, 아무래도 삶의 희로애락을 겪어보신 연로한 어르신들의 해석이 풍부해서라고 해 두죠. 젊은 연주자들도 테크닉이나 기량이 뛰어난 이들은 많지만, 아무래도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프로 연주자’의 차이는 ‘곡 해석에 있어서의 깊이 차이’로 갈린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조성진에 열광할 때 저는 그 사이에 껴 있지 않았습니다.
저의 친구 중 클래식에 관심이 있는 친구는 조성진의 연주를 좋아하는 이유로 ‘깔끔함’을 들었는데, 직접 감상한 조성진의 라벨 피아노 협주곡은 ‘깔끔함’을 넘어선 ‘투명함’이더군요. 많은 관객 분들이 2악장에서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감상 후기를 쓰셨던데...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앞으로 조성진이라는 피아니스트의 색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단 인상을 받았습니다. 맑고 투명한 그의 연주가, 앞으로 세월이 흐르고 음악적인 깊이가 더해졌을 때 어떤 색채를 가지게 될까 무척 흥미롭더군요. 기대치 않았던 부분이었지만 이번 연주회에서는 이런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조성진과의 협연 이전에 연주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후안 또한 무척 좋았습니다. 변화무쌍하며 다채로운 색채로 첫 무대에 걸맞은 프로그램이었다 할까요? 마치 ‘우리가 왜 베를린 필인지 보여주지!’라는 자신감 넘치는 인사와 같은 느낌? 깔끔하고 풍부한 연주(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비슷한 표현인 듯 하지만 실제로 깔끔한 한편 풍부한 해석이 있었습니다...-_-a)가 무척 좋았어요. 한동안 다른 연주자들과 다른 악단의 음악을 선호해 베를린 필하모닉의 음악들에 조금 소홀했었는데, 예전에 왜 제가 베를린 필을 가장 좋아하는 오케스트라로 꼽았었는지를 일깨워주는 그런 무대였습니다.
기대하고 갔던 래틀 경과 베를린 필하모닉의 브람스 교향곡 4번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습니다. 브람스는 중후한 해석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과는 맞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저는 좋았다고 말씀드립지요. 공격적이고 에너제틱한 해석도 또 다른 멋이 있고 맛이 있었거든요. 기도하는 마음으로 1악장 시작부터 마지막 4악장 끝까지 두 손을 모으고 경청했습니다. 실제로 한 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연주가 이뤄졌는데 체감상으로는 10분에서 15분 정도로 느껴졌으니 얼마나 집중하고 봤는지 짐작 가능하시겠지요. 물론 제가 집중한 것도 있지만 연주자들의 연주가 뛰어났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졌을 겁니다. 각개 개성이 넘치지만 또 조화로웠던 단원들의 연주, 그리고 단원들과 대화하듯 지휘하는 사이먼 래틀 경... 아아...(좌절) 왜 저는 이제야 그들의 무대를 직접 대면하게 된 것일까요... 진즉에 클래식 좀 듣고 공연 좀 챙겨 볼걸... 그런 후회가 가득 들었습니다.
조성진의 앙코르 곡도, 오케스트라의 앙코르 곡도 제가 좋아하는 곡들로 가득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2번 E단조는 그 어느 악단들의 연주보다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를 좋아합니다.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이 듣고플 때는 수시로 베를린 필하모닉의 버전으로(아마 카라얀의 지휘 버전으로 가장 많이 들었을 겁니다.)들었던 곡이었는데 직접 제 생 귀로 듣게 되다니 감개무량하기 이를 데 없었죠.
오늘 저녁 예술의 전당에서 있을 공연이 끝나고, 내일이 되면 래틀 경과 베를린 필은 일본으로 떠나 올해 아시아 투어를 마무리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래틀 경과 베를린 필이 함께 하는 모습을 다시 보기는 힘들겠지요. 하지만 래틀 경은 런던 심포니와도 계속 활동할 예정이고, 베를린 필도 새로운 상임지휘자를 맞아 새로운 음악을 선보이게 될 겁니다. 사이먼 래틀과 베를린 필이 각자 새로운 파트너와 (혹은 오래된 파트너와) 함께 한국을 다시 찾아준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겠습니다. ^-^ 당장 내년 10월에 런던 심포니와 함께 한국을 찾아주실 래틀 경을 먼저 기다리도록 합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