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저녁은 뭘 해 먹지?’
장바구니 속에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담아보지만 늘 허기지는 느낌은 뭘까?
시장 가판대를 훑다 문뜩 눈에 걸리는 도토리묵, 네모난 플라스틱 틀에 찰 지게 들어앉은 도토리묵에 저절로 손이 갔다.
도마 위에 흔들거리며 올라앉은 매끈한 도토리묵을 내려다보니, 문뜩 그 옛날 자상하고 따뜻했던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증조할머니를 보살피시느라 대전에 사셨고, 엄마는 날 데리고 서울에서 그곳을 자주 오가셨다. 할머니 집에 들어서면 마당 한편에 얌전히 자리 잡은 평상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나 그 위에는 곡식이며 산나물들이 머리를 얹은 듯 풍성하게 널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면, 할머니는 비닐봉지가 터져라 그것들을 담아 엄마 손에 쥐어주셨다.
가을이면 할머니는 도토리며 밤을 따러 산을 타셨다. 덕분에 도토리도 그것들 사이에 생뚱맞게 굴러다니던 개암도 보고 자랐다. 이제는 시장에 가면 헤이즐넛이라 불리는 외국산 개암이 지천이고, 토종은 아주 귀한 존재가 되었다. 한 입 깨물면 딱 소리에 도깨비도 도망간다는 야무지고 단단한 그 속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소한 맛이 숨어 있었다.
올망졸망 도토리들은 가을볕을 받아 반들거렸다. 할머니는 그중에 가장 때글때글한 녀석들을 골라 손에 쥐어 주셨다. 나는 그것들을 줄 맞춰 세우기도 하고, 모자를 비뚤 하게 눌러쓴 것들을 골라 한편으로 모아 놓기도 하며 평상에 앉아 도토리들과 뒹굴대며 놀았다.
할머니의 도마 소리가 토닥토닥 들려오고 그 장단에 맞춰 신나게 공기놀이를 하다 보면, 어느새 구수한 밥 짓는 냄새가 콧구멍 속으로 솔솔 들어왔다. 밥상 위에는 할머니가 말려두셨던 산나물 반찬에 강된장을 담은 뚝배기가 올려졌다. 할머니는 소복하게 올려진 밤밥에 고소한 참기름과 짭짤한 집 간장 그리고 깻가루가 솔솔 뿌려진 나만의 도토리묵 한 접시를 올려주셨다. 나는 냉큼 밥상머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조심스럽게 쌓아 올려진 도토리묵은 마치 젤리로 만들어진 케이크처럼 보였다. 맨 꼭대기에 올라앉은 놈을 젓가락으로 콕 찌르면 요리조리 삐죽거리다 사방에 깻가루를 뿌려대며 접시에서 튕겨져 나갔다. 입을 악다물고 다시 고놈을 잡으려 들면 젓가락 사이를 실룩실룩 약이 오르게 빠져났다. 할머니는 다른 놈을 수저로 조심히 떠서 갓 지은 밥 위에 올려주셨다. '건들건들' 뽀얀 쌀밥 위에 위태롭게 올라앉은 놈이, 혹여 튕겨질라 커다란 두 눈이 코끝으로 모아지고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는 '앙'하고 잽싸게 낚아채 물었다. 찰랑거리는 도토리묵이 쫀득하게 입안을 돌아다니다 사라질 때쯤이면, 작은 깨들이 톡톡 터지며 다음 밥숟가락을 기다리게 만들었다.
세월이 지나도 할머니는 시집간 손녀딸을 생각하며, 다락방 깊숙한 곳에서 가을 내내 잘 말리고 빻아 두었던 도토리를 꺼내, 불 앞에 앉으셨다. 혹여 탈까 나무주걱으로 살금살금 달래며 묵을 만드셨다. 아침이 되면 그 도토리묵을 배낭에 꾹꾹 눌러 담아 짊어지시고는 먼 길을 떠나셨다. 할머니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서울 역 에스컬레이터 앞, 할머니의 어깨가 앞으로 휘어질 만큼 무거웠던 배낭 안에는 손녀딸을 생각하며 밤을 지새우고 만드신 도토리묵이 들어있었다.
자식을 낳은 어미가 되었어도 할머니의 사랑을 나는 가늠할 수가 없다.
밥상에 올려진 도토리묵을 젓가락으로 쿡 찔러본다. 뚝하고 힘없이 조각난 묵을 내려다보다 수저로 떠서 입에 넣는다. 아무리 좋은 참기름을 들이부어도, 고급 간장과 국산 깨를 비벼 도토리묵 위에 수북하게 올려보아도, 그 옛날 할머니의 야무지고 찰지던 도토리묵 맛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가을이면 생각나는 할머니의 도토리, by 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