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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 소녀

긴장감

by 뺑덕갱


하얀 도복을 입은 꼬맹이들이 노랑 학원 버스에서 줄줄이 내렸다.

‘태권!!’

우렁찬 아이들의 기압 소리가 아파트 벽을 차고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어릴 적, 집에서 좀 떨어진 곳에 제법 큰 시장이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따라다니던 그 시장 길 옆으로 멋없는 회색 건물 한 채가 덩그마니 놓여있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아이들의 기압소리에 건물은 생생하게 살아났.

그곳에 보내달라고 몇 날 며칠 생떼를 부렸다. 엄마는 피아노 배우기를 원하셨지만 나는 이미 도복을 입은 태권소녀를 꿈꾸고 있었다.


헐렁한 도복에 팔다리를 집어넣으면, 뻣뻣하고 찬 기운에 소름이 돋고 몸이 움찔거렸다. 도복을 잘 여며 띠를 둘러 매고 양손으로 그 끝을 세게 잡아당겨 튕기면, 빨강 망토를 휘날리며 비행을 준비를 하는 슈퍼맨처럼 가슴이 벌어지고 허리가 곧게 펴졌다. 움직일 때마다 새하얀 도복에서 사각사각 사과 씹는 소리도 났다. 나는 하루 종일 도복을 입고 온 집안을 뛰어다녔다.


도장에 들어서자 남자아이들이 나를 빙 둘러쌓다. 나는 그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으며 태권소녀가 되었다. 발차기, 주먹 지르기 품새를 할 때면 도복 자락이 힘차게 펄럭였다. 절도 있는 바람소리, 각 잡힌 기압소리,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듯, 내 실력도 차근차근 쌓여갔고 검은 띠를 따기 위해 국기원으로 향했다.


전날 밤, 도복을 각지게 개어 머리맡에 놓아두고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질 않았다. 눈을 감으면 형광등 잔상이 눈알을 따라다녔다. 그날 이후, 특별한 날을 앞둔 밤이 오면 나는 밤빛을 쫒으며 잠을 이루지 못한다.


뚝딱대는 도마 소리와 솔솔 흘러드는 참기름 냄새가 잠을 깨웠다. 엄마는 분주하게 김밥을 싸고 계셨다. 그 아침은 백 미터 달리기 순서를 기다리며 운동장 구석에 모여 앉은 학생처럼 온 정신과 몸을 들뜨게 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 손을 잡고 국기원으로 모여들었다. 높은 천장 아래 관중석이 빙 둘러진 넓은 체육관, 그곳에 아이들과 가족들, 선생님과 심판들이 꽉 들어찼다.

사람들의 웅성대는 소리를 뚫고 간혹 기압소리가 체육관 천장을 향해 치솓았다. 나는 순서를 기다리며 곁눈질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그 넓은 체육관에 도복 입은 여학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눈은 나를 따라다녔고,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품새 시험이 끝나고 진정되는가 싶었지만 겨루기 시합에 이름이 호명되자 긴장감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매끈한 체육관 바닥에 맨발이 닿았을 때, 그 서늘하고 휑한 느낌을 아직도 기억한다. 반듯하게 줄이 그어진 경기장 안으로 들어서자 긴장감은 점점 부풀어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느껴졌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남학생을 노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시작을 알리는 심판의 날카로운 기압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두 다리는 튀어 올랐고, 그 순간 몸은 가장 잘하는 발차기를 기억했다. 그러나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심판이 뛰어나와 나를 말렸고, 내 앞에 서 있던 남학생은 얼굴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단 앞차기 한방에 시합은 종료됐다.


발차기도, 코피를 흘리며 울고 나간 남학생도, 나에게 그 순간은 하얗게 부서진 순간만 남았고 태어나 처음 느껴 본 긴장감, 터질 것 같았던 나 자신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고 먼 곳에서 그날을 돌아본다. 어린 태권소녀를 꽁꽁 묶어버린 긴장감과 들뜬 아침 풍경은 아무리 멀리 왔어도 희석되지 않는다. 이제는 어리고 팔팔했던 나의 감정들을 뒤로하고, 나는 이제 하얀 도복 대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쨍한 조명이 내려쬐는 무대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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