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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내려온다

2. 고마워요!

by 뺑덕갱

인연은 엉뚱하다.

어느 날, 어느 순간, 바람 손에 이끌려 날아든 여린 꽃잎처럼 마음 언저리에 슬쩍 앉아버렸다.


숲이 좋아 그 품으로 들어갔고 4월의 숲에서 나는 5월을 기다렸다.

인연은 그 계절의 가운데서 한송이 꽃떨기가 되어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산 밑으로 도토리 키재기 하듯 아담한 빌라들이 줄지어 산을 에워싼 동네.

촘촘한 계단이 산자락을 타고 이어져 내려 누군가를 맞이하고 배웅한다.

언니와 냐옹이를 만나고 헤어질 때면, 우리는 그 계단 끝머리에서 다홍빛 노을을 바라보며 내일을 위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안녕!'


지난 초겨울의 문턱, 쌀쌀한 날씨에 움츠려 든 저녁 동네, 언니는 빌라촌을 떠돌던 냐옹이를 만났다.

시들한 잡초처럼 마르고 허기진 아기 냐옹이, 허겁지겁 받아먹은 닭고기 몇 점.


'고마워요! 고마워요!'


아기 냐옹이는 까만 눈 속에 언니를 담았고, 그 눈빛에 언니는 냐옹이를 마음으로 품었다.


'까만 눈 속에 언니를 담다.' photo 정민님


작년 겨울은 그 어느 해 보다 겨울다운 겨울이었다. 한파란 단어가 뉴스에 자주 들락거렸다.

그 겨울이 우리 곁을 쌩하니 지나가고 봄을 불러왔을 때, 동네를 떠돌던 길고양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냐옹이와 언니에게도 그 겨울이 지나갔다.


날씨에 귀를 기울이고 저녁이 오면 얼어붙은 창밖 너머에 눈을 두었다.

강추위가 동네를 꽁꽁 묶어버린 날은 졸인 마음으로 하얀 눈이 두툼하게 쌓인 계단을 허겁지겁 밟아 올라갔다. 허연 입김이 각이 지게 뿜어져 나오는 날에는 냐옹이를 안아 들고 차에서 지친 몸을 녹여주었다.

그 모진 겨울, 언니의 그늘에서 기특하게 살아남은 냐옹이는 봄과 함께 상 고양이로 자라 숲에 주인이 되었다.


'숲에 주인이 된 냐옹이' photo 정민님



'친절한 냐옹이와 따뜻한 언니' photo 갱이



어스름한 저녁이 되어 아쉬운 작별을 하고 뒤돌아 설 때면 냐옹이는 집이 없는데 어딜 갈까? 걱정이 하나 둘 딸려왔다. 얼마만큼 걸어와 뒤돌아 보면 계단 끝에서 우리를 배웅하는 냐옹이가 보였다.


산자락이 끝나는 곳에 언니가 살았다. 냐옹이는 그 빌라 현관 앞에서 언니를 애타게 불렀다. 그러면 그 집 강아지가 악다구니로 짖어댔고, 그 소란에 집주인은 언니와 냐옹이에게 친절하지는 않았다.

길 생활에 눈치가 늘었을까, 계단 끝머리에서, 숲 속에서 냐옹이는 언니를, 언니는 냐옹이를 늘 기다렸다.

밥을 챙겨주고, 밤새 숲과 길을 떠돌며 달고 온 상처를 보듬어 주고 숲을 뛰어다니며 함께 했던 시간들, 이젠 연기처럼 아련하게 지나 간 날이 되었지만, 알알이 꿰어진 그 수많은 날들은 믿음이란 끈으로 이어지고 헤어질 수 없는 가족이 되어갔다.


나는 그들이 걱정하고 위로받으며 함께한 날들을 다는 알지 못한다. 그저 느낄 뿐이다.

기술적인 글과 말로도, 끝없는 숫자의 행렬로도 나는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언니는 냐옹이와 교감하며 변해가는 자신이 신기하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제가 고양이에게 마음을 줄 줄을 몰랐어요."

우리 집 냥이, 싼초를 만나기 전엔 나도 그 마음을 몰랐다.


냐옹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애틋해질수록 하루살이 같은 냐옹이에 대한 언니의 걱정도 커져갔다.

그리고 어느 날, 언니는 마음먹었던 일들을 준비했다.


아카시아 꽃망울이 알알이 맺혀 가는 5월의 어느 날, 냐옹이는 험했던 산 생활을 끝내고 언니 품에 안겨 이곳을 떠나갔다.


'이제는 걱정을 놓아요!'


산에 오르면 나를 반겨주던 친절한 냐옹이와 따뜻한 언니를 이제는 만날 수 없다. 그들이 머물렀던 벤치에 앉아, 헤어지고 만났던 계단에 서서 애틋하고 따뜻했던 그 시간들을 흐뭇하게 돌아볼 뿐이다.

'5월의 숲' photo 갱이


'5월의 숲이 이렇게 쓸쓸하고 아름다웠나!'

그들을 축복하고 내 허전한 마음을 위로하듯 숲이 아카시아 꽃다발로 팡빠레를 울려준다.


'친절한 냐옹이' photo 정민님
'가족이 된 냐옹이' photo 정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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