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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피로회복제

by 뺑덕갱

커피와 함께한 알 같은 나날들, 오늘도 커피 한잔을 타볼까?

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믹스 한 봉 털어 넣는다. 바글바글 끓는 물 끼얹으니, 까슬한 설탕은 바닥으로 녹아 떨어지고, 굼뜬 크림은 머리 풀고 우왕좌왕이고 허깨비 커피는 갈 곳 잃고 물 위를 동동거린다.


아주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 간 이모의 커피선물은 변함이 없다. 깡통에 든 네스카페 커피 한통과 분홍 립스틱, 바다를 건너온 커피는 동서 프리마, 백설표 설탕 한 봉지와 함께 나란히 우리 집 찬장 안에 모셔져 있었다. 손님이 오는 날이면 엄마는 그 커피세트와 아껴둔 꽃무늬 찻잔으로 최고의 대접을 하셨다.

커피 하나, 프림 두 개, 설탕 두 개, 믹스 커피 탄생하기 전 엄마의 최애 비법이었다.

달큼하고 시크한 커피 향이 집안을 솔솔 떠다니고, 커피잔을 우아하게 부여잡은 어른들은 한 모금에 수다 열 마디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커피 타는 일은 의식 같기도 했는데, 눈을 꿈뻑이면 엄마는 쥐 요강만 한 차 숟가락에 커피를 떠서 맛보라고 주셨다. 그 첫맛은 수많은 숫자와 대적할 수가 다. 추운 겨울날 엄마가 타주시던 코코아 차는 너무 어리고, 어른들의 커피는 현관 앞에 널브러져 있던 엄마의 삐딱 구두에 내 작은 발을 집어넣었을 때처럼 어른이 된 것처럼 맛이 났다.

커피는 어른들만의 지적인 공유물 같았고, 빨리 어른이 되면 대접 한가득 타서 이 갈망을 해소해 보리라 생각했었다.


중학생이 되어 엄마 대신 커피를 조제하다 맛보기의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아무도 없는 날이면 양장본처럼 장안에 들어앉은 커피에 손을 댔다. 시간이 흘러 커피에 대한 자유 권한이 생겨났지만 그때 그 맛은 조제가 안된다. 마시면 어른이 될 것 같은 마법의 가루.


증조할머니를 모시고 사셨던 외할머니도 식사를 마치고 나면, 커피세트가 담긴 쟁반을 방바닥에 놓으시고는 두 분이 꾸부정하게 앉으셔서 커피를 만드셨다. 커피 한 개, 프림 두 개, 설탕 다섯 개 할머니들만의 커피 제조법이었다. 백 년 가까운 세월을 사셨던 증조할머니의 커피 사랑은 언제부터였을까? 새삼 궁금하다.


머리도 띵하고, 기운도 없고, 소화도 안 되는 날은 커피가 약이다. 커피에 붙은 이국적인 이름들을 줄줄 꿰거나 맛집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시고, 떫고, 쓰고, 단 심오한 맛도 모르지만, 코끝을 튕기는 요망한 커피 향에 오늘도 맥 못 추고 물을 끓인다.


매일 커피를 즐긴다 by 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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