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읽는 이야기
따가운 마당에 소나기가 잠시 쉬어 간다.
곱게 분칠한 꽃들은 얼굴 상할라 고개 숙이고, 잎 마른풀들은 갈증을 달랜다.
마당 구석에 허하게 걸쳐진 거미줄, 소나기가 꿰어준 물방울 매달고 여왕의 목걸이 마냥 뽐낸다.
귀한 손님은 홀쭉해진 먹구름 떼와 다시 길을 떠나가고, 텁텁한 흙냄새, 쌉쌀한 풀 향기가 할머니네 마당 위를 풀풀 떠다닌다.
매콤한 봄을 건너고 지루한 여름을 인내하니, 마당은 흥 오른 꽃들로 가득하다.
꼬꼬 머리 닮은 맨드라미는 빗방울 꽃머리에 달고 건들건들 마당 구경 중이다.
이른 봄, 어린 꽃잎 위를 뒹굴던 아기나비는 이제 우아한 숙녀가 되어 꽃마당을 비행한다.
헤벌죽 웃고 있는 나리꽃, 코 박으니 야무진 향이 콧등을 후려친다. 쪼그려 앉으니 흙탕물 뒤집어쓴 채송화들이 옹기종기 발밑에 모여 앉아 불평이다.
어디선가 나타난 할머니 손, 맨드라미 머리채 잡아 소쿠리에 휙 던져 넣으신다. 옆에 있던 나리꽃이 화들짝 놀라 헐거워진 이파리 떨군다. 눈 한 번 움찔하니 일이 벌어졌다. 입이 삐죽 나온 어린 갱이는 할머니 뒤를 따라 부엌으로 건너간다.
쌀가루 퍼서 양푼에 담고 소금 한 꼬집 보태준다. 뜨거운 물 슬슬 부어 주물럭대니 쪼글쪼글한 할머니 손에 희고 도톰한 장갑이 씌워졌다. 불쌍한 마음은 언제였나, 꼬질꼬질한 내 손에도 뽀얀 장갑이 끼워졌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다시 두 손 푹 담가 쪼물댄다.
할머니는 동글납작하게 빚은 반대기 위에 맨드라미 꽃 잎으로 수를 놓으신다. 엄마 외투에 달린 꽃 브로치 같다. 하얀 반대기 위에 빨갛게 눌러앉은 맨드라미 꽃이 단정하다. 가마솥뚜껑에 들기름 살살 펴 발라주니 낯짝이 반들반들, 뽀얀 화전이 자글자글 늙어 간다.
꾸덕한 조청에 노릿한 화전을 푹 담갔다 들어 올리니, 줄줄이 딸려 나오는 수염들, 마당 구석에 사는 터줏대감이 걸어 놓은 거미줄보다 더 심술궂다. 턱을 따라 옷 앞자락까지 꽁꽁 묶어버렸다.
화전 한 입 베어 무니 마당에 선한 바람이 들어선다. 늦더위 한 김 식혀주고, 고소한 들기름 향 품고 담장을 넘어간다.
꽃들은 살랑살랑 꽃머리 흔들고, 이참에 바람 따라 마실 가려다 발걸음 떼지 못하고 꽁무니만 바라본다. 구름 사이로 힐끔 마당을 훔쳐보던 해님과 눈이 마주치니 하얗게 마당이 흩어진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나의 소소한 순간들, 할머니의 맨드라미 화전에는 어린 갱이와 할머니, 자연을 머금은 마당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