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으로 읽는 이야기
병아리 개나리, 새색시 진달래 산허리 감아쥐고 고개 너머로 물결 지듯 번져간다.
아이들 웃음소리 울타리 너머 마을 어귀로 뛰어간다.
아버지는 슬쩍 지게 걸쳐 메고, 꽃들이 내려앉은 들판을 가로질러 소나무 숲에 다다른다.
들과 산에 봄꽃이 차오르면 소나무 꽃송아리도 댕글댕글 알이 여물고, 매운 봄바람이 채 갈라, 차곡차곡 지게에 담는다. 발그레하게 익어가는 봄햇살, 아버지 얼굴에 광이 나고 황금다발로 가득한 지게는 돼지저금통보다 더 두둑하다. 집으로 향하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춤바람 난 서방보다 가볍고, 이마 위의 땀방울은 옥구슬처럼 대굴 댄다.
싱글싱글 송화송이 도라도란 마당에 누워 봄 햇살 덮고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몇 밤 자고 나니 몸이 가벼워진 줄도 모른다. 아이들 장난치는 소리 마당 가까이 뛰어오면, 아버지 호통소리 쩌렁쩌렁 마당을 흔들고 송화송이 '움찔' 그 바람에 꽃가루 털린다. 투박한 함지박에 비단처럼 내려앉은 송홧가루, 비단 장수 왕서방이 탐낼라 걱정이다.
함지박에 조심히 물을 붓고 지난 늦가을에 따서 만든 박바가지 그 위에 띄우니, 그 등에 곱게 올라 탄 송홧가루, 황금 바가지가 따로 없다. 슬금슬금 등 긁어, 차곡차곡 가루 모아, 바람 불면 흩어질까, 비 오면 망가질까, 봄 햇살에 마지막 단장 시켜 똥배 두른 항아리에 조심히 담는다. 어머니가 아끼는 박가분보다 더 찰진 송홧가루는 귀한 약이 되었다.
풀벌레 소리 반짝반짝 떠다니는 가을 저녁, 아버지는 다락방 구석에 모셔둔 똥배항아리 조심히 꺼내 든다. 까칠한 봄 내내 정성 들인 송홧가루 사기그릇에 담고, 부뚜막 언저리 베개 삼아 밤새 고아낸 어머니의 달큼한 쌀 조청에 갠다. 동글동글 야무지게 뭉쳐 나무 다식판에 얹고 꾹 눌러주니, 금박 물린 새색시 치마단 같다. 두툼한 아버지의 손이 부대낀다.
단아한 나무상에 올려진 다식 한 접시, 잔병 많은 큰딸 먹일 생각에 아버지 콧수염이 춤을 춘다. “수명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당을 건너 사랑채 문을 두드린다. 신이 난 어린 딸은 마루를 콩콩 찍으며 달려간다. 무언가 싶어 접시에 코 박더니 약인가 싶어 뒷걸음질 친다.
그 다식 먹고 배앓이 나은 수명은 엄마가 되고, 나는 외할아버지의 송홧가루가 노랗게 날리는 봄이 오면 허공에 그들의 봄날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