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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단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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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일 Dec 24. 2021

컨셉진 키워드 단편 소설 임자, 드라마, 수도


“임자, 이제 그만 일어나서 밥 먹어요 테레비 다 닳겠네.”

 할아버지는 이미 성할 대로 성한 두 가느다란 팔로 작은 밥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제는 색도 제대로 안 나오는 뚱뚱한 브라운관 티브이에는 한창 유행하는 멜로드라마가 방영 중이었다. 숟가락을 손에 든 채까지도 할머니는 시선을 티브이에서 뗄 줄 몰랐다.

 “아이고 내가 송장이랑 밥을 먹나, 임자 이것 좀 먹어봐요.”

 할아버지는 투덜대면서도 잘 마른 굴비 한 점을 발라내 할머니의 숟가락에 얹어줬다. 

 “오늘 볕도 좋은데 여 앞에 좀 걸을까?”

 “이번에 최영감댁이 고구마를 한가득 캤다지 뭐야.”

 “누렁이가 요즘 통 안 오네. 우리 함 걸으면서 찾아볼까요?”

 할아버지의 말에도 아랑곳 않고 할머니는 티브이 속 드라마만 쳐다볼 뿐이었다. 할아버지도 이내 지쳤는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숟가락을 들었다.

 “....여보 우리도 바다 보러 갈까?”

 할머니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티브이 속에선 한창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백사장을 걷고 있었다. 티브이 속 햇살이 여기까지 내리쬐는 것 같다. 할아버지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둘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전쟁을 피해 이 먼 산골로 들어와 살게 된 지 벌써 70년이 됐다. 그 흔한 신혼여행은 커녕, 혼인신고도 제대로 하지 못한 둘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빈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녹슬 대로 녹슨 수도에서는 한참 동안이나 불투명한 액체를 쏟아낸 뒤에야 투명한 물을 뱉어냈다.

 “다 먹으면 거기 놔둬요. 내 이따 치울게.”

 할머니는 여전히 티브이만 응시할 뿐이었다. 할아버지는 바깥으로 나왔다. 한참 동안이나 떨어진 강가를 향하는 발걸음이었다. 그는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이 근처 강가에는 바다에서 휩쓸려 온 조개껍질들이 몰려온다고. 작고 어여쁜 조개껍질. 할아버지는 그 얘기가 정말 들었던 건지 가물하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재촉할 뿐이었다.

 강가에 도착한 할아버지는 한참이나 바닥을 들쑤셨다. 더 이상 얼마나 걸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때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렸고, 불어오는 물살을 이기지 못한 채 넘어진 그의 무릎엔 피가 비와 뒤섞여 묽게 흘러내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미 어둑해진 하늘은 비를 그칠 줄 몰랐고 할아버지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는 듯 급하게 집으로 향했다.

 번개가 친다. 바람이 거세진다. 비는 꼭 재앙을 부르는 것처럼 매서울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완전히 어둑해진 거리를 더듬거리며 조금이라도 내딛을 뿐이었다.ㅤㅤ

 할머니는 잠에서 깼다. 햇살이 내리쬐고 새들이 지저귄다. 꼭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햇살이다.

 “영감, 영감 어딨어요?”

 자리엔 밥상이 그대로 놓여있었고 티비엔 아침을 알리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영감! 장난치지 말고 나와요!”

 “내가 쓸데없는 소리 해서 화났소?”

 “바다 안 가도 되니까 어여 나와요.”

 그러나 티브이 소리 외엔 아무런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할머니는 밥상을 응시하다가 조용히 밥그릇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그녀는 오랫동안 수도를 응시하더니 조용히 마루로 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조용히 바깥을 응시했다. 


 녹이 슨 수도에서는 계속해서 불순물을 내뱉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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