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처음으로 보드를 탔다.
스키장에 온 것은 두 번째 만이다.
친구의 설명을 듣고 몸으로 해보니 내 몸이 꼭 남의 몸 같다. 의지대로 움직이려 해도 술에 만취한 것처럼 가늘기가 힘들다. 혹시나 도움이 될까 싶어 본 이론 영상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처음 넘어질 때 디딘 왼쪽 손목이 아직도 욱신거린다.
그렇게 슬로프 아래에서 몇 번을 연습해보고 리프트를 타 초급자 코스로 올라간다.
내려오고 넘어지고를 반복. 자꾸만 엉덩방아를 찧는데 뭐가 재밌는지 자꾸만 웃음이 난다. 초급자를 두어 번 탔을까, 이제는 내려오면서 브레이크를 거는데 넘어지지 않는다. 다시 앞으로 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리프트를 타고 내려올 때마다 조금씩 늘어가는 게 느껴진다. 몇 번 타니 고글과 모자는 거슬리기만 한다. 추울 줄 알고 잔뜩 껴입었는데 등에는 땀이 흐른다.
한 시간쯤 타고 정설 시간과 겹쳐 친구와 밥을 먹으러 가는 길에 친구에게 자꾸 내 상태를 설명한다. 이번엔 덜 아프게 넘어지는 걸 알겠다. 힐로 브레이크를 거는 게 더 익숙해지면 속도를 내도 무섭지 않겠다. 얼른 밥 먹고 또 타고 싶다 등. 신이 나 흥분된 목소리를 감추지 못한다.
정설을 마치고 이번엔 바로 중급자로 올라갔다. 초급자와는 달리 한참을 타고 올라가는 리프트. 겨울바람이 살갗을 스쳐온다. 보드 타는 동안은 몰랐던 추위가 조금씩 올라온다. 하얗게 펼쳐진 눈밭이 설레 온다.
중급자에 내려가기 전 정비를 마치고 서 있으니 친구가 어서 내려오라며 손짓한다.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다시 왼쪽 끝으로 반복해서 가라는 친구의 말. 브레이크를 걸며 속도를 줄이고 위험하다 싶으면 언제든 뒤로 넘어지라고 조언해준다. 나는 조심스레 내려가기 시작한다.
초급자 코스에서는 느낄 수 없던 속도감이 붙는다. 정설을 하는 동안 그새 감을 잃었는지 속도에 정신을 못 차렸는지 얼마 가지 못하고 넘어진다. 정설 후 첫 코스는 다시 넘어지기를 반복했다. 내려와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나는 다시 친구에게 이번엔 무게중심이 안 좋았어. 속도가 나서 넘어지기에 급급했어. 등 내 상태를 설명한다. 아니, 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두 번째에는 아까의 실수를 생각하면서 내려온다. 다시 넘어지고 일어나고. 처음엔 일어나는 데에만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이젠 넘어지면 바로 일어나서 출발한다.
그렇게 네 번째 코스가 되었을 때 사진에 보이는 끝 지점까지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갔다. 브레이크를 자연스럽게 걸 수 있고 멈춰 서도 어색하지가 않다. 탈 때마다 자신감이 더 생기고 아픈 줄 모르고 보드를 즐긴다.
방심했을 때 가장 위험하다 했던가. 중심을 아예 잘못 잡아 앞으로 고꾸라졌다. 공중에 떠 앞으로 박고 한 바퀴 굴렀다. 자연스럽게 다리를 피고 앉은 자세가 되었는데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순간 눈에 초점이 나간다. 이내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린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방심하지 말 것.' 남은 코스를 내려오고 친구와 잠깐 쉬었다.
방심하지 말 것.
다른 중급코스도 타보고 몇 번을 더 타니 처음 일어나려고 온 신경을 썼던 건 기억도 안 날 만큼 자연스럽게 내려올 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내려왔다.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신기했다. 넘어질 각오만 하고 온 내가 중급자 코스를 타고 있다. 아무리 타도 피곤하지 않다. 입가는 자꾸 미소가 지어진다.
어느덧 폐장시간이 다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탈거냐는 친구의 말에 고민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냐, 오늘은 여기까지만 타자. 아쉬워야 금방 또 올 것 같아."
친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집으로 향했다.
연애를 할 때에도,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도 그랬다. 처음은 너무 어렵고 어색했다. 온 신경을 다 쓰지만 내가 꼭 내가 아닌 것 같았다. 때로 자신감이 줄지만 조금씩 나아진다. 스스로가 괜찮다고 느껴질 즈음 꼭 사고를 냈다. 첫 사고는 정신을 차리기 조금 힘들고, 결국 다시 일어난다. 그대로 주저앉으면 다음은 오지 않는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목표지점에 도달한다.
요즘 몸을 잘 쓰지 않았다. 힘이 들면 술을 마시고 쉴 땐 영화나 책을 봤다. 운동과 조금씩 멀어졌고 몸이 편할수록 생각은 많아지고 상념에 시달리다 새벽에 겨우 잠에 들었다. 그렇게 하루를 반복.
툭하면 입 밖으로 '사는 게 재미가 없다.'를 내뱉었다.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고 새로운 세상에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쳇바퀴 돌듯 살았다. 집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핸드폰만 들여다 보았다.
오늘 하루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다음 보드를 탈 때는 오늘만큼 신나고 설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또 가서 넘어지고, 일어서고, 다시 나아갈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