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사랑으로 주신 라디오
중학교 2학년 무렵, 퇴근하는 아버지의 손엔 새 라디오가 들려 있었다.
AM/FM 겸용 라디오에 시계가 부착된 최신형 라디오였다.
빨간색 본채에 검은색 버튼으로
시계를 조절하고 그 시간에 따라 알람 기능으로 라디오도 켜졌다.
아버지께서 그 라디오를 주시며,
"혼자 있을 땐 음악도 같이 들으면서 책 봐라."라며 말씀하셨다.
그날부터 라디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애용품이었다.
그전에는 온 가족이 함께 쓰는 라디오와 카세트 플레이어가
함께 붙어 있는 큼직한 오디오를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방에서 나의 라디오로 좋아하는 방송을 골라 청취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라디오는 나와 동고동락을 하는 친구가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밤늦도록 최신 팝 음악과 사연을 들었다.
시계 기능으로 아침에는 알람으로 썼고, 시간을 맞춰두면
음악이 켜져서 활기찬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서 공부하겠다는 생각에 새벽같이 라디오가 켜지도록 시간을 맞춰 두었다.
정작 일어나진 못했지만 음악은 조용히 방을 채우며 감동적으로 들려왔다.
어스름한 새벽,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포로들의 합창"이 방 안을 웅장하게 울려왔다.
그 음악은 마치 내 삶을 조용히 흔들어 깨우는 듯했고,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아직도 그 음악을 들을 때면 그 새벽, 그 결심이 생각난다.
그리고 내 기억에 오래 남은 또 하나의 곡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이다.
부드럽지만 외로움이 스며있는 피아노 곡으로
사춘기 시절 내 마음 한 구석을 조용히 채워주던 곡이었다.
지금도 그 시절, 어두운 방안 책상 위에 놓여있는 라디오의
시계에서 나오는 초록색 빛과 스탠드 노란 불빛,
그리고 그 앞에 앉아서 책을 읽던 시절의 내가 그립다.
여름 한 낮, 열린 창문 사이로 보이던 파란 하늘과
북한산의 백운대, 인수봉까지 모두 라디오를 들으며 보고 느끼던 일상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절 함께 했던 그 라디오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고장이 났는지, 오래돼서 버렸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내 안에 조용히 숨 쉬고 있다.
그 새벽의 음악들과 책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은 지금도 내 가슴에 또렷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