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했지만 풍부한, 풍부하지만 부족한
오늘 오후에 몰(Mall)에 갔었다. 연말이 지나자 재빨리 밸런타인데이 테마로 쇼윈도를 장식하고 있어서 '벌써?'라는 생각을 하며 지나갔다.
연말이면 내가 일하는 곳에도 어르신들의 가족들이 사 오는 초콜릿으로 넘쳐난다. 각종 유명 브랜드의 초콜릿 상자와 정성스럽게 만든 수제 쿠키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일 년 동안 어르신들을 보살펴 드린 것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중에서 각자 좋아하는 맛을 취향껏 골라 먹는다. '앞으론 단 거 먹지 말아야지!' 결심하지만, 매번 달콤한 초콜릿 유혹 앞에 무너지고 만다.
넘쳐나는 초콜릿과 과자를 보면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가끔 집에 미제 맥심 커피 한 통이나 립톤 홍차 한 상자가 생기면,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면서 오랫동안 귀하게 아껴서 드셨다. 다 드신 후 남은 빈 홍차 통은 예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철제 통이라 엄마의 보물 상자로 사용했다. 그때도 그걸 살 형편은 되었겠지만, 정작 본인이 드시려고 그걸 사시는 걸 보지 못했다. 지금 같으면 인스턴트 맥심 커피는 마트에서 흔하게 파는 건데 말이다. 넘쳐나는 커피 종류와 원두커피, 믹스커피, 그리고 캡슐커피까지 다양하게 나오는데, 그 시절 엄마는 그 커피 한 통만 생겨도 참 소중하고 감사하게 드셨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지금 시대로 오신다면 슈퍼에 가득한 커피와 수많은 식재료를 보고 얼마나 놀라실까?
내가 국민학교 4학년 즈음 처음 손목시계가 생겼다. 그때는 '만화 시계'라는 걸 손목에 차고 있으면 아이들의 부러움을 살 때였다. 난 백설공주가 그려져 있는 시계가 생겨서 내 손목이 번쩍번쩍 광이 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귀한 시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시계를 손목에서 풀어 아무 데나 놔두면 아버지께서 엄청 싫어하셨다. 여러 번의 경고에도 귀담아듣지 않다가 아버지께 혼난 기억이 있다. 아버지 시대의 시계는 워낙 귀하고 소중한 것이었는데, 나는 너무 쉽게 생긴 시계가 그렇게까지 귀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꾸중 이후 시계는 소중하게 간직하게 되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오는 박싱데이까지 연말엔 내 지갑을 열라고 각종 광고를 한다. 나도 1년 이상 벼르던 5년 된 스마트폰을 최신 기종으로 바꾸고 대형 TV도 샀다. 새 전화기와 확 커진 화면을 보며 즐겁지만, 어린 시절 우리 집에 처음 TV를 샀을 때만큼의 기쁨이나 설렘은 없다.
내가 어린 시절, 우리 집은 셋방살이를 했었다. 주인집 마루에 TV가 있어서 그걸 보러 가면 내 또래였던 집주인 딸이 나만 TV를 못 보게 심술을 부리곤 했다. 울면서 엄마한테 가면 엄마는 나를 꼭 안아주고 TV 보러 가지 말라고 다독여 주셨다. 그 후 곧 이사를 해서 우리 집이 생겼고, 드디어 TV를 사게 되었다. 그 작은 TV 앞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면서 웃고 떠들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었다. 그 뛸 듯이 기뻤던 설렘과 기쁨은 아무리 큰 TV가 생겨도 다시는 느끼지 못할 기분이다.
상가나 쇼핑몰마다 물건이 넘쳐나는 세상이 됐다. 집에 넘쳐나는 가전제품이며 옷이며 모두들 아깝다는 생각은 안 하고 사는 것 같다. 내가 아끼는 나의 애장품도 내 손을 떠나면 결국 쓰레기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 캐나다는 연말 박싱데이라고 해서 세일을 크게 한다. 일, 이주 전부터 온라인에서 세일이 먼저 시작된다. 예전에는 나도 새벽부터 줄을 서서 물건을 사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필요한 물건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 시기가 돌아와도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나도 물건을 정리할 때가 됐고 더 이상 물건을 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며 다른 사람의 물건을 정리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커피 한 통, 오래된 손목시계 하나에도 행복했던 그 시절. 부족했지만 부족한 줄 몰랐던 그때와, 아무리 채워 넣어도 갈증이 나는 지금, 그 소박했던 시절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