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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Jul 19. 2024

같은 방향 다른 계단을 이용하는 두 남자

7월 19일 출근길

  "아, 여보세요?"

  "..."

  ○○○번 버스를 타고 오른쪽 두 번째 이인좌석에 앉았다. 바퀴 때문에 바닥이 올라와 웅크리고 앉아야 하는 자리. 바로 뒤이어 한 사람이 들어오고 있어 창가 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이 자리는 매번 앉기에 번거롭다.


  앉자마자 왼쪽 뒤에서 컬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나이가 들은 목소리였다. 3 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 메마르고 끝이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퇴근하고 있어요."

  "..."

  "퇴근, 퇴근이라구."

  "..."

  "아... 두 시는..."

  통화 상대방의 소리는 당연히 들리지 않았다. 아마도 두 시 정도의 약속시간과 장소에 대해 가늠하는 통화였다.


  "... 엘지는..., 삼성..."

  "%@#&$¿..."

  이번에는 왼쪽 이인좌석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귀에 흘러들었다. 30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그들은 텔레비전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칼칼한 목소리는 쉽게 약속을 정하지 못하고 비슷한 얘기를 계속하고 있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소리와 두 남자의 대화하는 소리가 중복되어 들려왔다. 어느 것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버스의 소음까지 더해져 들리는 두 가지 소리는 그렇다고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소란스러운 말소리들은 도리어 복작복작거리는 생동감을 일으켰다.


  어느덧 버스는 돌곶이역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두 남자는 같이 일어났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슬쩍 되돌아보니 칼칼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 머리가 새하얗고 두툼한 안경을 쓴 나이 지긋한 초로의 남자였다.

  '무슨 일을 하기에 모두 출근하는 이 길을 퇴근하고 있을까?'

  내가 내릴 때에도 그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먼저 내린 남자들의 대화가 멀찍이 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그중 한 남자의 소리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

  "... 볼 수 있어요..., 난 그렇게 봐요..."

  "..."

  "... 스포티비를 볼 수 있어요."

  "..."

  "... 여러 개 있어요. 홍콩티비도 있고 다른 것도 있고..."

  이번에는 상대방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십이요? 아니면 오십?"

  "오십 인치요,... 괜찮아요."

  남자들의 대화는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계속되었다.


  두 남자 중 한 남자는 푸른색 질감 있는 양복 재킷에 청바지와 운동화를 신었다. 걸을 때 오른쪽 발목이 많이 꺾여 불안스러운 모습이었다. 커트 머리에 안경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얼굴만 한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다른 남자는 검은색 점퍼에 짙은 면바지를 입었다. 그 남자의 머리도 커트 머리였는데, 숱이 적어 햇빛에 비치며 성겨 보였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며 지하철 개찰구를 지나가고 좀 더 나아가더니 서로 인사를 했다.

  "안녕히..."

  "네, 좋은 하루..."

  인사를 나눈 후 한 남자는 오른쪽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고 다른 한 남자는 앞으로 더 걸어 나가더니 오른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뭐야? 같은 방향 아냐!'

  뒤에 내려간 남자는 2-3번 출입구 앞에 섰다. 먼저 내려간 남자를 볼 수 있는지 되돌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같은 방향이기는 하지만 열차의 한 곳에서 같이 타지는 않았다. 환승하기 빠르거나 하차하기 편한 출입구로 서로 헤어져 움직인 것이다. 이동하기 편하다는 얘기하기 좋은 구실과 암묵적인 예의 차림으로 그들은 적당히 아는 사이로 만족하는 모습일 게다.


  신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탔다. 회색 정장을 입은 젊은 남자가 내 곁에 섰다.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어어, 여기, 왕십리역이니까... 갈 수 있겠어..."

  남자는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휴대전화에 대고 말했다.

  열차는 방금 신당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왕십리역은 두 정거장 앞이었다.... 이 남자의 마음을 알만 했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가늠하고 때로는 가볍게 거짓말하는 관계. 현대인의 회색빛 관계는 바빠서도 자존심 때문도 너무 많은 만남 때문도 아니다. 자신의 매력을 잊어버려 타인의 매력도 볼 수 없게 마음이 시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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