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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유재 Jul 23. 2024

지하철 걸 크러시

7월 23일 출근길

  열차가 신당역에 도착했다. 내가 내리는 1-3번 출입문에 사람들이 내리려고 모여들었다. 1-1번이나 1-2번에는 1-3번보다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환승 시간이 조금밖에 짧지 않음에도 첫 번째 차량은 매번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기서 '짧다'는 것은 거리에 대한 생각도 있겠지만 시간에 대한 긴장도 포함된다. 사람의 무리에 휩쓸리며 접촉하고 밀고 부딪치고, 주의하고 살펴보고 신경 쓰고, 인상 쓰고 짜증 내고 한숨 쉬고. 사람들은 시간을 도둑맞은 <모모>의 회색신사들처럼 '부족한 시간' 속에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열차를 내리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저 앞으로 계단이 보였다. 그 앞으로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걸어가며 계단 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깨와 어깨들이 닿을 듯 가까워지고 앞뒤로 겹쳐지며 움직였다. 사람들의 머리들이 하나의 표면을 만들어 물비늘처럼 오르락내리락하며 계단으로 향했다.

  내 앞쪽 두어 사람 너머에서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남자는 연파랑의 굵기가 한 뼘은 되는 스트라이프 상의와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었다. 뭉툭한 몸매로 어깨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었다. 그는 엉덩이에 걸치게 어깨가방을 메고는 터벅터벅 걸었다. 그 남자의 왼쪽 약간 뒤로 한 여자가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몸매가 드러나는 검은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 차림이었다. 바지는 넓이가 여유 있어 걸을 때마다 공기를 찰싹찰싹 치댔다. 마른 편인 상체 위로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까지 내려와 흔들거렸다.


  여자가 고개를 약간 틀며 남자에게 말했다.

  "옆에 뭐......"라는 소리였다.

  남자의 대답이 웅웅 거리는 소음 속에 '네?...'라고 들린 듯했다. 남자는 귀를 기울이고 듣는 듯하더니 고개를 여기저기로 움직이며 살폈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남자는 고개를 틀어 어깨 뒤로 옆구리로 자기를 살폈다. 남자의 옆구리와 어깨 사이 등 쪽으로 연녹색의 손가락만 한 곤충이 보였다. 남자가 보기 어려운 위치였다.


  순간 여자가 팔을 뻗어 오른손으로 곤충을 움켜쥐었다. 정말 움켜 잡았다! 망설임 없는 손동작이었다. 여자는 빠르게 아래로 팔을 내리더니 손을 펼쳤고 곤충은 사람들 다리 사이 어느 구석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남자는, 남자의 눈길은 여자의 손을 찾는 듯하더니 여자를 보는 듯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정면으로 되돌리고 계단을 올라섰다. 여자도 똑각 똑각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적인 야생으로의 변신, 요즘 유행하는 '걸 크러시'는 원시로부터 잠재되어 온 자연스러움의 분출현상이다.


  처음의 모습처럼 잔물결 같은 사람들의 머리들이 계단을 오르며 경사면을 만들었다. 머리들은 이제 좀 더 크게 춤을 추듯이 울렁울렁거리며 계단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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