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출근길
눈은 감거나 뜨거나 할 수밖에 없다. 눈을 감고 갈 수 없으면 눈 둘 곳이 필요하다. 이럴 경우 초점에 피사체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출근하는 사람들은 확실한 피사체를 가지고 있다. 휴대전화. 그 외로는 개찰구나 열차시간을 알려주는 전광판, 출입구와 앉을 수 있는 빈 의자 또는 시달리지 않을 수 있는 빈 공간 정도가 있다. 이들에게 사람은 그냥 주변에 있거나 돌아다니는 그림자 같은 검은 물체일 뿐이다. 검은 물체가 사람 모양 같아 한번 눈길이라도 주려고 하면 낯섦에 눈동자를 돌리게 된다.
나는 출근하며 사람들의 뒤통수를 가장 많이 본다. 어쩔 수 없다. 걸을 때 휴대전화를 보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전방을 주시하고 걷는데 전방에는 늘 뒤통수들이 즐비하다. 다음으로 옆얼굴을 많이 본다. 버스 정거장에서 열차 객실통로에서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게 사람들의 옆얼굴이다. 표정이 온전하게 보이지 않는 옆얼굴은 반쯤 열린 그림자일 뿐이다. 온전한 인상을 보고 싶다.
방법은 마주 오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돌곶이역 대합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대부분 승강장으로 내려가고 있었고 올라오며 나와 마주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당역이 사람들과 제대로 마주칠 수 있겠네.'
신당역에 내려서 50걸음을 걷고 계단을 32개 오르고 다시 40걸음을 걸으면 높은 계단이 나온다. 계단이 53개나 된다. 계단을 올라 200걸음 정도 걸어 2호선 잠실방향으로 꺾어지는데 이 구간이 안성맞춤이다. 이곳에서 사람들과 마주쳐 보았다.
계단을 올라 ‘높은 계단’ 쪽으로 걸었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 계단 쪽으로 오는 사람들과 마주 스쳐 지나갔다. 맨투맨 티셔츠 차림으로 30대 초반의 남자가 보였다. 고개를 수그리고 무표정에 무초점으로 지나갔다. 다음에는 미색 오리털 파카를 입은 여자였다. 목도리를 감싸 올리고 마스크를 쓴 채 정면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왼쪽 옆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그 너머에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가 있다. 조금 거리가 있지만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오는 사람들의 정면을 볼 수 있었다.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여성이 얇은 파카를 입고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을 보며 성큼성큼 내려왔다. 살짝 긴장된 모습에 에스컬레이터의 속도가 더해져 위태로워 보였다. 그 뒤로 30대 후반의 남자가 정면을 응시했지만 뚜렷한 초점 없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옆에 살짝 기댄 자세로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이 선 채로 내려오고 바로 뒤이어 한 남성이 휴대전화를 보며 턱턱턱턱 걸어 내려왔다. 휴대전화를 보는 표정들이 어둡지는 않았지만 무표정 일색이었다. 계단을 거의 올라갈 즈음 외국인 두 사람이 몸짓을 크게 하며 에스컬레이터에 들어섰다. 이들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서는 초점 없이 정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국적 불문 비슷한 건가...'
이제 수평의 무빙워크를 왼편으로 해서 걸어갔다. 무빙워크에는 휴대전화를 보는 사람들이 이어졌다. 30대 초반의 안경을 쓴 한 남자가 이쪽 광고나 벽면을 둘러보는 눈길로 지나갔다. 이곳에서는 드물게 피사체를 담은 눈빛이었다. 다시 휴대전화를 보며 걷는 사람, 휴대전화를 보며 서서 가는 사람, 다시 그런 사람. 그 뒤로 약간 고개를 숙이고 터벅터벅 걷는 무표정한 사람이 지나갔다. 어깨를 흔들며 말똥말똥 눈 표정을 약간 짓고 정면을 응시하며 걷는 남자가 뒤따랐다. 이 외에도 수십의 사람들을 마주쳤지만 눈에 담기에는 너무 짧은 마주침이었다. 어느새 무빙워크의 시작점에 다다랐고 나의 표정 탐색은 끝이 났다.
'이러 짓을 왜 하고 싶었던 거야…?’
스스로 되물었다.
잠실역에 도착했다. 개찰구를 나와 왼쪽으로 튼 후 오른편으로 비스듬히 걸어가다 우회전을 한다. 오른쪽으로 기둥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개찰구로 가려는 사람들이 마주치며 지나갔다. 무표정한 젊은 여자, 휴대전화를 보는 남자, 그 뒤 검은색 옷을 입고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하며 지나치는 또 한 사람.
불현듯 가슴에서 하나의 생각이 올라왔다.
'나를 찾고 있었던 거구나!'
오늘 스쳐갔던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내 모습을, 내 표정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열 시간 후 이 길을 걸어가야 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