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9일 출근길
집을 나와 사거리를 건넜다. 세상은 아직 어둑어둑하다.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번 버스가 신호등에 걸려 서있다. 버스는 횡단보도에 전조등을 쏘더니 나의 걸음에 따라 옆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버스 옆면의 커다란 광고가 보이고 그 위로 격자형 창문을 통해 전등 빛에 훤한 버스 안이 보였다. 버스 안에 서있는 사람은 없었다. 종점이 멀지 않기 때문이다. 창가에 몇 사람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앞으로 열두 시간 뒤에는 나도 저 속에 있을 것이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돌곶이역 지하철 출입구를 내려갔다. 대합실에 다다르자 바로 앞쪽의 계단을 오르는 나의 뒷모습이 보이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른쪽으로 꺾어 개찰구로 향했다. 개찰구는 중앙에서 왼편에 두 개, 오른편에 네 개가 설치돼 있다. 나는 주로 오른쪽에서 두 번째 개찰구를 이용한다. 개찰구를 지나며 교통카드를 태그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퇴근하는 내가 세 번째 개찰구를 지나쳤다. 옆구리 높이로 사각의 검은 가방을 메었는데 가방을 엉덩이 쪽으로 살짝 밀더니 허리를 약간 수그리고 지나치는 모습이었다. 여느 지하철 개찰구에서 스쳐 지나는 사람처럼 회색 물체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나는 개찰구를 지나 직진을 하다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걸어 계단으로 내려간다. 계단으로 가는 중간쯤에서 왼쪽의 반대편 계단을 올라와 개찰구로 가려는 나를 볼 수 있었다. 두툼한 트렌치코트를 입고 청바지에 진초록 가죽 스니커즈를 신었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상반신을 옹송그리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뒤로 보내며 헤어졌다.
내 모습은 신당역에서 다시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오고, 복도를 걸어오고, 그 위쪽 계단에서도 내려오고 있는 나와 스쳐 지나갔다. 계단을 모두 올라 긴 통로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200걸음을 걸어야 한다. 130미터가 넘는 거리다. 시선을 멀리 두고 걸었다. 멀리서 나로 보이는 피사체가 보였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예의 알았던 모습이 두드러졌다. 트렌치코트, 청바지, 처진 어깨, 움츠린 목. 얇은 안경테 속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다. 메마른 얼굴 피부는 누릿하고 머리는 엉성한 직모의 단발이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초점 없이 앞을 바라보며 걸어왔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답답했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 움직이고 그는 왼쪽에서 나타나 뒤쪽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며 볼 수 있을 만큼 바라봤다. 그렇게 나의 열한 시간 뒤 모습과 헤어졌다.
잠실역에 도착해서 개찰구를 나왔다. 나는 왼편으로 꺾은 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걸어가다 우회전을 한다. 오른쪽으로 기둥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 개찰구로 가려는 나와 마주쳤다. 이제 퇴근한 시간일 텐데 표정 없이 약간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며 지나쳐갔다.
여기까지 오며 나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셀 수도 없이 봐왔던 내 눈빛을 볼 수 없었다.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눈빛 없는 표정은 읽을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눈빛을 보고 싶다. 내 눈빛을 보고 싶다!'
마음속이 안타까워졌다. 군중 속 나를 알고 싶은데, 그래야 남도 알게 될 것 같은데. 노래가사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난들 너를 알겠느냐
이 짧은 시간에서조차 나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 이번 글로 ‘가을’편을 마칩니다.
12월은 겨울이지요. 춥기에 따듯할 수 있는 계절. 초라한 글이지만 글로 온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읽어 주시고 라이킷과 댓글을 남겨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