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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서정의 조건, 사람

2월 14일 출근길

by 박유재

선선한 바람이 쏴아 하고 불어온다. 세차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바람이다. 봄바람이기에는 서늘한 바람이다. 얼굴에 부딪치는 느낌이 말 그대로 시원하다.

"사사사사 사삭 사사삭!"

겨우내 떨어지지 않고 버틴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나뭇가지들과 서로 비벼대며 스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든다. 주위는 잠시 조용해지고 어둑함이 느껴진다. 하늘은 얇게 흐리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빗방울을 모두 떨구고 나면 하늘은 흐린 꺼풀을 벗게 될 까.

바람이 다시 불었다.

"트닥 다닥 트득 턱 덕 트르르르."

낙엽이 장난스럽게 뎅구른다.

골목길을 걸어 나온다. 골바람이 얼굴에 부딪치며 머리칼을 흩트린다. 눈가를 건드리며 간지럽힌다. 사거리 어귀를 지나가는데 철제 난간에서 소리가 일어난다.

"땡 때댕 땡땡, 때댕 땡."

마치 풍경소리 같다. 난간에 매달아 놓은 알림판이 바람에 흔들리며 난간을 때리고 있었다.


여기는 경계점이다. 사거리를 지나는 차량들의 소음, 세상의 소란함이 멈추는 곳. 아직은 조용하고 아직은 스산해서 어느 골짝 속 풍경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경계.

눈앞에는 빨간 신호등이 켜져 있었다.


신당역에서 환승 통로를 걸어갔다. 2호선에 못 미쳐 있는 가게가 오늘은 번잡스럽다.

"자, 김밥이 나왔습니다. 빵이 천워언."

책상만 한 매대 세 개가 일렬로 나란히 붙여져 있다. 그 뒤에서 가게 주인인지 점원인지 모를 젊은 남자가 목소리를 내며 판매를 돋우었다. 포장된 김밥이 있고 그 옆으로 비닐 포장된 여러 종류의 빵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가게 입구 건너 오른편에는 손수건들을 가지런히 정렬해 놓은 매대가 있었다. 가게 전면을 모두 매대로 채워야 한다는 생각에 궁여지책으로 나온 매대로 보였다.

스쳐 지나는 잠깐이지만 매대 앞에서 구경하는 사람도 다가서는 사람도 볼 수 없었다. 포장된 공장 빵은 어떤 유인도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쁜 출근길, 경유하는 이곳에 누가 멈춰 설까?'


이곳은 얼마 전까지 신발이며 장갑이며 잡화를 파는 곳이었다. 출근길에 가게가 열린 것을 본 적이 없고 퇴근하며 판매원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다.

보름 정도일까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출근하며 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어서 휑뎅그렁한 가게를 보면서 지나쳤었다. 텅 빈 가게에 눈이 꽂히고 몇 번 더 꽂히고 난 후에는 그런 게지하며 지나쳐 갔었다.

건조한 남자의 목소리를 뒤로 하며,

'얼마나 갈까…?'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생각이었다.


2호선으로 갈아탔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여자 셋이 열차에 타더니 출입구 한쪽, 줄의자에 걸쳐서 모여 섰다. 그들은 서로 도란도란 얘기를 했다. 얼굴이 앳되어 보이는 한 학생은 오늘의 여정이 기대되는지 한껏 들뜬 표정이었다.

열차 안에서도 바람은 불고 있었다. 환기장치는 날개를 조정하며 여기저기로 바람을 보내고 있었다. 약하지도 강하지도 않은 일정한 세기의 바람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싱그럽지도 않았다.

‘살아있지 않은 바람이야…, 왜 바깥바람과 차이가 날까?’


몇 정거장을 지난 후 갑자기 한 학생이 주저앉았다. 바로 옆 의자에 앉은 젊은 중년의 여자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 앉아요."

대답이 없다.

"여기요, 앉아요. … 금방 내려요."

주저앉아 고개를 떨군 학생은 손을 들어 흔들고,

"우리도 금방 내려요…"

옆이 학생이 대답했다.

잠시 어정쩡한 시간이 지나고 주저앉은 학생이 일어났다. 소매 아래로 보이는 손이 하얗다. 의자에 앉았는데 얼굴도 허옇다. 중년의 여자는 동행이 있었는지 동년배로 보이는 옆의 여자와 눈짓을 교환하고 짧게 얘기를 하고 멀뚱멀뚱 주변을 쳐다봤다. 그런 모양 속에 정거장들을 지나갔다.


잠실역에 중년의 여자와 동행하는 여자가 내렸다. 앞서가는 그들의 대화가 주변 소음과 함께 들려왔다.

"처음엔 그렇더라니까."

“…”

"… 엘리베이터말이야."

“…”

"… 그런 적 없어?"

그들은 웃음기 있는 표정으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잠실역을 빠져나갔다. 그들의 대화 속에 열차에서 겪은 일은 없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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