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출근길
'소일'이란,
1. 어떤 놀이나 일에 마음을 붙여 심심하지 않게 세월을 보내다
2. 별로 뚜렷하게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
'두 번째의 의미로 30년을 보냈어.'
개략 계산해 보니, 출퇴근 시간이 22,300시간이 된다. 연 단위로 바꿔보니 2.5년이 된다.
‘30년 중에 2.5년 정도구나. 그럼, 회사에서 보낸 시간은?’
일 년 기준으로 주말과 공휴일을 빼고, 8시간 근로시간과 1시간 휴게시간으로 계산해 보니 회사에서 7.5년을 보냈다.
‘7.5년? 나는 30년 동안 회사생활 외에 딱히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퉁 친 것들을 챙겨 보았다. 보통 한 시간에서 삼십 분 정도 일찍 출근하거나 늦게 퇴근한 시간, 젊을 때 토요일 오전에 일한 시간, 현장에서 한 달에 이틀 밖에 못 쉬며 일한 시간, 한 때 주말에도 뻔질나게 회사에 나온 시간 등등. 대충 셈해보니 2년 가까이 될 듯하다.
30년 중 9.5년을 회사에서 보냈다. 출퇴근 2.5년을 더해 돈벌이에 매달린 시간이 12년이 된다. 그리고 출퇴근으로 소비한 시간이 회사에서 보낸 시간의 사 분의 일이나 된다. '별로 뚜렷할 것' 없이 출근에 매인 이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간접적으로 금전을 만들어내는 '준 생산적인 시간이었다’고 만족하는 것이 덜 아쉬울 듯하다.
출근길, 하늘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다행인 것은 무겁지 않았다.
'차라리 어두운 게 나을 것 같아.'
어제 하늘은 세차게 비를 내리 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즘의 표정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밝고 구름이 섞여 있고 햇살이 강한 표정. 이 정도면 괜찮은 날씨인데 내게는 왜 아쉬울까? 강한 햇살 때문인 것 같다. 게다가 오늘은 아침부터 후덥지근하기까지 했다.
사거리를 지나며 모퉁이 빗물을 받는 배수구에 푸른빛이 보였다. 직사각형 배수구 왼쪽에는 고래의 머리가, 오른쪽에는 꼬리가 픽토그램의 형식으로 그려져 있었다. 고래의 입 아래에는 '쓰레기 버리면 안 돼요'라는 귀여운 문구가 보였다.
'글씨까지 써 놓아야 예방 효과가 있겠지…'
도시의 물을 깨끗하게 만들자는 가벼운 호소였다. 오늘은 이런 류의 소일거리라도 해 볼까? 첫 번째 의미로.
이제는 이 도시의 바닥들에 눈들을 그려보자.
개의 눈, 고양이와 소와 돼지의 눈을 그려보자.
무엇보다 사람의 눈을 그리자. 많이 많이 그리자.
버스정류장 바닥에도, 버스 지붕에도, 횡단보도에도, 지하철 출입구 바닥에도 눈들을 그려 보자.
웃는 눈, 우는 눈, 흘겨보는 눈, 놀라는 눈, 안타까운 눈을 그려 보자.
무엇보다 편안한 눈을 그리자. 많이 많이 그리자.
하늘이 표정 지을 수 있게.
많은 눈들의 주목에 얼굴을 붉히며 속웃음을 머금도록.
'왜 이렇게 쳐다봐아.'
하늘이 속웃음을 참지 못 하고 표정이 일그러지도록.
다음에는 코들을 그려 볼까?
벌름벌름 생동감 있게 많은 코를 그려 보자.
공기가 흘러 다니다가 정신을 똑! 차리도록.
더워진 몸으로 열차에 탔다. 덥다.
'왜 시원하지 않지?'
약냉방칸에 탄 건가 생각하며 열차의 유리창을 쳐다봤다. 뒤쪽의 유리창도 돌아보았다. ‘약 냉방 칸’이라는 문구가 보이지 않았다. 덥다. 표정이 굳어져 버렸다. 2호선도 비슷했다. 그나마 승객들이 적어 답답하지 않았다. 다들 굳어 있는 표정들.
열차의 바닥에 문구를 적어보자.
'살짝 웃어 주세요'라고.
벽에도 유리창에도 천정에도 글씨를 새겨보자.
슬쩍 웃음 짓는 픽토그램과 함께.
그런 상상을 하며 쓱 입꼬리를 올려 보았다. 볼의 근육이 어색한 긴장으로 부르 떨렸다. 한번 더 겉웃음을 지어 보았다. 다시 한번 더. 이렇게 소일을 하며 잠실역에 도착했다.
*오해는 말자. 이삼일 지나 6호선에서 볼 수 있었다.
'이곳의 일곱 개 좌석은 다른 곳 보다 바람의 영향이 적고 온도가 2도씨 높은 자리입니다(하절기).' 예전에는 한 량 전체가 약냉방칸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부분적으로 삼분의 일 정도만 약냉방을 하고 있었다. 열차는 남모르게 서비스를 점점 향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