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는 코리안 타임, 케냐에는 케냔타임
지구상 모든 나라는 똑같이 24시간을 가지고 있다. 대륙별로, 나라별로 시간대가 다를 수는 있겠지만, 한 나라의 한 개인은 모두 똑같이 24시간의 하루를 보낸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모든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시간이 존재한다. 한국에는 코리안 타임이, 케냐에는 케냔타임이 존재하는 것처럼.
요즘에는 잘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종종 신문이나 책에서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수식했던 글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한국을 이렇게 묘사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서양사람들에 의해서 였다고 하는데, 당시 일본이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라고 묘사된 것과 비교한다면 ‘고요한 아침의 나라’는 다소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에는 뭔가 신비하고 오묘한, 미지의 세계 같은 의미를 담아 한국에서 널리 사용된 것이겠지만.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벗어나 ‘아침의 나라’라는 수식어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케냐야말로 진정한 ‘아침의 나라’라고 생각한다. 신비하고 오묘하기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다른 나라에서보다 빠른 아침을 맞이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케냐의 모든 은행은 아침 8시 반이면 문을 연다. 그렇게 아침 일찍 업무를 시작해도 9시만 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용무를 보러 은행 이곳 저곳에 가득하다. 케냐 생활 초반에는 이 사실을 모르고 9시까지 맞춰서 갔다가 거의 앞에 10명 정도를 기다리고 기다려서야 겨우 내차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관공서도 예외는 아니다. 동사무소 역시 8시 반에 문을 열기 위해서 공무원들이 8시부터 이미 업무준비에 한창이다. 내가 업무상 만났던 많은 공무원들은 오전 중에 미리 잡힌 일정이 있을때면, 아침 8시 반에 미팅을 제안한 적도 여러 번 있었으며 심지어는 그 시간부터 외근을 나가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새벽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이미 부지런히 하루를 시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본적은 있지만, 아예 정부 건물에 은행까지 이렇게 나라 전체가 일찍 아침을 여는 나라는 본 적이 없었다.
은행이나 정부 건물들은 이렇게나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데, 어째 케냐 사람들 자체는 ‘시간’에 그리 큰 의미를 두는 것 같지 않았다. 이러한 깨달음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고 케냐 사람들과 하나 둘씩 직접적으로 소통을 하는데서 오게 되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내가 진행하는 프로젝트 위원회 회의를 예로 들 수 있겠다.
나는 분명 회의 시간을 9시라고 공지했건만, 9시 정각까지 딱 오는 사람은 한 두명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10시까지 아주아주 여유롭게(그리고 당당하게) 도착한다. 나 역시 한국에서 시간을 그리 잘 지키는 축에는 속하지 못하기에 그들에게 큰소리로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것은 나름대로 공식적인 회의자리이지 않은가! 그들의 엄청난 여유로움에 충격을 받은 나를 두고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나 위원회 사람들은 늘 “Welcome to Kenya” 혹은 “This is Kenyan time~!” 하며 허허허 웃어넘기기 바쁘다.
어느 덧 반년 이상을 이리 지내다보니, 이제는 “Kenyan Time!” 하면서 5~10분 정도의 지각을 무마하곤 하는 나 스스로를 발견할 때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그들의 도착예상시간을 예측할 수 있게 되어서 약속시간을 원래 시간보다 1시간은 일찍 잡거나 빨리오는 5명에게는 소정의 상품(이라고 쓰고 대게는 과자를 준비...)을 제공하는 등 나만의 스킬이 하나 둘 씩 생기게 되었다.
혹자는 이런 이야기를 접할 때면, “역시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을러”라던가 “역시 더운 나라 사람들은 느리다” 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내가 만난 많은 케냐사람들은 사적인 약속은 물론 공적인 자리에도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잘 지키는 케냐 사람들은 존재했고 오히려 나보다도 빨리 준비하여 나를 재촉하는 케냐 사람도 있었다. 어느 나라이건 어느 인종이건 한 뭉터기로 일반화되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는게 아닌가 싶다.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그간 많은 케냐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그들이 ‘시간’을 대하는 태도랄까, 그런 것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느끼기에 케냐 사람들은 ‘시간’을 좀 더 음미하고 즐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일전에는 조금 이른 퇴근을 하는 길에,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나 길에서 잠시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었다. 나는 그냥 한 두마디 안부 인사정도만 나누고 가던 길을 가고자 했는데, 인사만하고 집으로 계속 향하려는 나의 발걸음을 눈치라도 채셨는지, 아주머니가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시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혹시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어? 늘 느꼈지만 외국인들은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 우리들은 길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나면 이런 저런 이야기하면서 시간을 보내는데 말이야.”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잠시 멈춰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전에는 얼굴만 알고 지나쳤던 아주머니가 알고보니 한국에 여행도 다녀오셨다는 것, 한국말도 한 두마디 할 줄 아신다는 것 등 그간에는 몰랐던 새로운 점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다시 향하는 길에, 문득 한국에서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대학에서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바쁘다는 이유로 친구들과 만날 시간도 많이 없어졌는데, 우연히 학교에서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할 때도, 서로의 바쁨을 너무도 잘 이해하기에, 그간의 근황과 반가움을 전할 넉넉할 시간도 없이 우리는 웃는 얼굴로 지나치기 마련이었다. 그때의 그 기억들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면서, 이런 생각의 순간을 준 아주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케냐의 시간은 여유로움과 게으름 그 미묘한 경계 어딘가에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의 이 글이 당신에게 아프리카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