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의 회장과 마윈이 들은 경영 수업을 만든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경영 부실 기업에 입사하여 단 한명의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처한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어도 도피할 수 있는 방안이 없었기에 그는 오히려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퇴근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일하고 공부하며 일에만 온전히 ‘몰입’했다고 한다. 그러자 삶이 바뀌었다고 한다. 밤낮으로 쉴새없이 하던 연구에서 드디어 성과가 나기 시작했고, 경쟁사들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의 문제를 해결하여 쇼후공업을 업계 최고로 일으켜냈다고 한다. 물론 후에는 그 기업에서 나와 ‘교세라’를 창업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일의 기쁨과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처럼 살면서 무엇인가에 푹 빠져 그것에만 온전히 ‘몰입’해본적이 있는가. 아마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는 대입 준비가 그러한 몰입과 치열함을 경험하는 첫번째 계기일 것이다. (물론 시대가 많이 바뀐 지금은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18살과 19살은 내 인생에서 지금까지도 가장 치열하게 살았던 시기이고 또 무엇인가에 온전히 몰두하여 그 ‘재미’를 느낀 시기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는 자율형 사립고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인문계 고등하교처럼 자동으로 배정받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학교로 찾아가 신청을 해야했다. 교육환경이 별로 좋지 않았던 동네에 살았던 나는 ‘이대로 가다간 평생 대학 문턱도 못 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일부러 집에서 1시간 떨어진 이 고등학교에 지원을 했다. 부모님은 이게 무슨 고등학교인지도 잘 모르셨는데, 내가 꼭 가고 싶다고 졸라서 들어간 학교였다.
학교에서는 1학년 때부터 진로를 기준으로 반이 구분되었는데, 나는 엄마의 강요로 ‘의사’라는 직업을 적어내어 결국 이과 1반에 소속되게 되었다. 이야기만 들으면 범생이들만 우글우글할 것 같지만, 우리반 아이들은 그 어떤 반보다 활발하고 재미있었으며 사건사고도 참 많았었다. 학교생활을 너무 재미있었지만, 내 뜻이 아니었기에 나는 계속 그 반에 소속되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2학년때 문과로 전향을 하게 되었다.
1학년 때부터 문/이과가 나뉘는 학교였기에, 내가 2학년때 이과에서 문과로 전향을 했을 때에는 거의 아는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도 처음부터 하나씩 다시 만들어야했고,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도 빨리 적응해야했다. 친구들이 어느정도 생기고 반 아이들과 쉬는시간마다 뛰어놀게 되었을 때, 문득 아이들이 ‘의자왕’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문과의 의자왕이었던 그 친구는 아침 조회시간부터 점심시간까지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며 공부를 했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의자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 친구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가끔씩 이야기할 때에는 재미있게 이야기도 잘하면서 쉬는시간, 점심시간, 야자시간에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만의 공부를 해나갔다.
성적표가 전교생에게 공개되도록 교실 앞에 붙여지는 날이면, 아이들은 전교 1등을 하던 그 친구를 두고 천재라고 치켜세웠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나는 이상한 불편함을 느꼈다. 그 아이는 이 반에 있는, 어쩌면 우리 학교에 있는 그 어떤 사람보다 치열하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그 아이의 그런 노력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걔는 원래 머리가 좋아. 집이 잘살아”하면서 그 아이의 노력을 그냥 치부해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적어도 내가 누군가에게 “천재”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 사람정도의 노력은 내가 해봐야하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어이없는(?) 이유로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공부에 몰입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나는 그 친구와 함께 의자왕이 되었다. 쉬는시간에도, 점심시간에도 절대 일어나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 비록 통학시간이 길었지만, 나는 늘 교실 불을 제일 먼저 키고, 제일 먼저 끄는 그런 아이가 되었다. 잠자는 시간 6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말 하루 18시간을 온전히 공부에만 집중했다. 물먹는 시간도 화장실을 가는 시간도 아까웠다. 자연스럽게 의자왕과 나는 친해지게 되었고, 이듬해에도 같은 반이 되어 수험생활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나 친구를 따라 나도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그동안의 학창시절을 말해주듯, 성적은 그렇게 내 마음처럼 쉽게 오르지 않았다. 열심히 제대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성적은 매번 제자리였다. 그렇게 나는 초조한 상태로 19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런데 19살이 되고나서 처음보는 3월 모의고사에서 내가 일을 내버렸다. 그동안 계속 지지부진하던 국어와 영어 성적이 몰라보게 성장한 것이다. 이과였기에 수학은 그래도 걱정없이 잘 해나갔지만, 오랜 시간 누적해서 공부를 해야했던 국어와 영어는 좀처럼 성적이 오르지 않었기에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그 후 치른 4월 모의고사는 더 대단했다. 그때는 전과목 1등급을 맞아, 소위 전국 4% 를 기록했었다. (엄마아빠가 이 때 성적표를 코팅하여 액자로 걸어둔 것은 아직도 우리집에 고스란히 있다.) 이후 대학 수시 서류 접수 전 부모님과의 상담에서 담임 선생님은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이렇게 J커브 형태로 성장하는 학생은 본적이 없었다고. 지금 성적대로라면 상위 10개 대학에는 무난히 원서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감사해요, 선생님...!)
부모님이 원하는 대로 선생님이나 공무원처럼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은 지금의 나를 두고, 두 분은 아직도 이 때를 회상하곤 한다. 비록 지금은 말도 안듣고 제멋대로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래도 살면서 두 분께 잊지못할 효도를 했던 것 같아 마음의 짐이 조금 덜하긴 하다.
전과목 1등급을 맞았던 그때의 나는 수능을 잘봐서 잘먹고 잘살고 있을까? 안타깝지만 인생은 결코 그렇게 순탄하지 않다. 수능날 첫과목인 국어를 무려 4등급으로 죽쒔던 나는 사회탐구 과목도 모두 4, 5등급으로 망쳤지만, 영어와 수학에서 1등급 맞아 학생부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학생부 전형은 내신에서 1등급을 맞은 개수가 특정 조건 이상, 수능에서 국영수 중 두 과목 이상 1등급 등의 조건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지원했던 논술 전형의 수시 5개는 모두 처참히 탈락했고, 하루에 3개의 학교에서 동시에 결과발표를 하던 날, 나는 침대를 온통 눈물로 적셔냈다. 아빠는 무서워서 방에 들어가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비록 제일 원하던 학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위 10위권 내 대학에 나는 당당히 합격하게 되었다. 모두 의자왕 그 친구 덕분에!
의자왕 친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클래스는 역시 영원하다. 당연하게도 그는 서울대에 자기가 원하는 학과로 멋지게 입학했다. 입학 후 그는 의자왕 가죽을 말끔히 벗어내고는 화려하게,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놀았다.
얼마 전, 의자왕 친구가 내년에 결혼을 한다고, 자기 남자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고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서 어색할까 걱정도 했지만, 역시는 역시. 치열했던 그 시절을 함께하며 서로 동고동락했던 동료답게, 우리는 어제 만난 것처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어김없이 의자왕 시절의 우리를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지만, 함께하는 동료가 있어서 지치지 않았고, 또 공부하는 재미가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회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