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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Mar 02. 2021

5. 세상에 보낼 준비를 하다.

(태교일기) 내가 엄마가 된다면 - 2편. 내려놓음

 아이를 가졌다. 40주 동안 아이는 나의 뱃속에서 자라며 항상 나와 함께했다. 나의 자궁은 아이의 따뜻한 보금자리였고, 탯줄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밥을 먹으면 아이도 영양분을 받았고, 내가 이동하면 아이도 함께 움직였다. 아이의 움직임은 그대로 내게 전달되었고, 나의 움직임과 기분도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이는 마치 내 몸의 일부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아이를 ‘갖고 있다’고 느꼈던 시간은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뿐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는 엄마로부터 자유로워졌다. 물론 태어나서 바로는 혼자서 먹지도, 걷지도, 말하지도 못했지만, 분명 ‘자기 의지’를 가진 한 인격체였다. 엄마 뱃속에서 나올 시간도, 모유를 먹고 싶은 때도, 자고 싶은 때도 스스로 결정했다. 시끄럽거나 주변 환경이 낯설면 울면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다. 혼자 다리 운동을 하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에는 스스로 벽을 잡고 일어섰다. 세상에 귀를 쫑긋쫑긋 세우더니 말도 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내 생각대로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했다. 단지 말을 하지 못하고, 울음으로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서 그렇지, 아이는 생각할 줄 알고, 주변의 환경을 느낄 줄도 알았다. 아이가 나의 소유물인양 매번 나의 의견을 강요했다면, 아이는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하는 꼭두각시가 되거나, 반항기 가득한 아이로 컸을지 모른다. 그렇게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나는 아이의 엄마이기도 했지만,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동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는 소유의 대상이 아닌, 존중해주어야 할 독립적 인격체라 여겼다.


 아이를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받아들이며 아이의 독립성을 이해했다. 아이들은 혼자 걸을 줄 알고, 밥 먹을 줄 알고, 말할 줄 알기 시작하면 다른 사람에게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하기 시작한다. 자아가 형성되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은 점점 커진다. 보살핌보다 자유를 더 사랑하게 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언제나 내 품에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챙겨줘야 할 것만 같았던 아이가 그렇게 자유롭고 싶어할 때,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그렇게 크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아주 반길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아이는 건강한 사회인으로 커가고 있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가 어릴 때부터 아이의 의사를 존중해주었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의사표현을 하는지 알기 위해 노력했고, 내 의지대로 억지로 끌고 가려 하기 보다는 되도록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아이가 울거나, 밤중에 자꾸 보챌 때는 무조건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보채지 말라고 하기 보다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가 진짜 알아들었을까 싶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이야기 해주다 보면 아이는 울음을 멈추었다. 초기에 아이의 생각을 읽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은 힘든 일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아이가 존중과 배려를 배우게 되는 첫 순간이라 생각하자 그 순간순간들이 소중하게 여겨졌다.


 아이가 크는 동안에도 계속 아이를 존중했다. 존중의 힘은 우리의 마음을 평온하게 했고, 서로를 믿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존중은 나에 대한 존중으로 돌아왔다. 내가 존댓말을 했더니, 아이도 내게 존댓말을 했고, 내가 무슨 일을 할 때면 아이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아이도 무슨 일을 할 때면 내게 항상 의견을 물었다. 또한 우리는 각자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고, 서로가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 하지 않았다. 가끔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서로의 입장을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아이의 독립성을 이해하고, 아이의 생각을 존중하면서, 늘 아이를 세상에 보낼 준비를 하는 엄마로 살았다. 아이가 처음으로 집을 떠나 2박 3일 캠프를 떠나던 날이 기억난다. 아이는 설레임에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나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떠나는 날 아침,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며 아이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날의 걱정은 물론 기우였다. 캠프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의 모습은 밝았고, 한층 더 자란 것만 같았다. 무사히 잘 다녀온 아이가 참 기특하게 여겨졌었다. 


 그 후 아이가 크면서 여행이며, 연수며 집을 떠날 일이 더 많아졌다. 때로는 홀로 해외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는 어른이 되어 갔다. 엄마의 도움이 점점 필요하지 않는 어른이 되어 갔다.


 아이가 다 자라서 나의 곁을 떠난다는 생각을 하다 보면 종종 두려움이 앞서고는 했다. 그 때마다 아이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생각의 끝은 늘 같았다. 내가 붙잡고 있다고 해서 아이가 더 행복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도 있겠지만, 그러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 깨우치게 될 것이다. 


 세상의 다양함을 경험하며 마음이 깊고, 넓은 사람이 될 것이다. 부모의 보살핌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 될 것이다.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유로운 존재였으니, 세상에 나아가 훨훨 날 수 있도록 더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내가 할 일 이었다.


 지금 보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난 후에는, 나의 외할머니처럼 나이 드는 엄마가 되고 싶다. 할머니는 늘 자식들이 행복한 것이 최우선이었다. 자식들이 본인에게 연락을 잘 안 한다거나,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절대 섭섭해하지 않았다.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잔소리도 거의 하지 않았다. 늘 자식들과 손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으며, 만날 때 마다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또한 친구들도 자주 만나고, 여행도 다니고, 꽃과 물고기도 기르고, 건강함을 지키면서 즐겁게 살았다. 할머니를 보면 늘 기분이 좋았다. 자식들과 손자들 모두 할머니를 좋아했고, 고마워했다. 할머니의 덕 때문인지, 할머니에게는 늘 복이 따르는 것 같았다.


 할머니를 보며 자식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를 배웠다. 비워야 채워진다는 의미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식들에 대한 바램, 욕심을 모두 비우고, 그저 자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만을 바랬는데, 그 빈 자리는 늘 자식들의 사랑과 관심으로 채워졌다.


 만일 내가 아이를 ‘소유했다’ 생각했다면, 나에게 모든 것을 맞추려고 했을 것이고, 어쩌면 아이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관계로 멀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아이는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인정해주고, 이해하고, 존중해주었다. 아이가 더 커서 나를 자주 찾지 않는다고 해도, 섭섭하지 않을 것 같다. 그만큼 혼자서도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나는 나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가 아이가 문득 보고 싶을 때면 잠시 아이에게 다녀와야겠다.


*파란색 글은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며 쓴 글입니다.


(Cover Image by Joseph Gonzalez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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