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휩쓸릴 때가 있었다. 친구 A의 아이는 세 살부터 영어를 가르쳤더니, 이제 다섯 살인데 영어로 인사도 하고, 노래를 부른단다. 친구 B의 아이는 학원을 여러 개 다니더니 그림도 제법 그리고, 피아노도 잘 치고, 태권도까지 한다. 어릴 때는 주입식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보다 자연에서 뛰어 놀고, 친구들과 놀이를 하고, 같이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친구 아이들의 이야기는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했다.
그런 의문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조용히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남과 내 아이를 비교하고 있는 나, 빨리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고 조급해하는 나, 나의 가치를 확신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보며, 부끄러워졌다.
비교는 자기 반성을 통한 성장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만의 아름다운 가치를 잊게도 한다. 장점을 보지 못하고, 단점을 들추게 된다.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보면서 우울해진다.
나는 남들과 비교하는 것이 싫다. 그런데 아이를 남과 비교하고 있었다. 아이가 영어, 그림 그리기,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는 능력보다도 더 값진 경험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잊고 흔들리고 있었다.
또 조급해하고 있었다. 조급함은 나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아이가 이것도 잘했으면 좋겠고, 저것도 잘했으면 좋겠고, 다 잘해서 어떤 것에도 꿀리지 않는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불쑥 올라왔던 것이다. 아이는 아이의 능력에 맞추어, 자신이 배우고 싶은 것을 차근차근 배워가며 자라고 있는데, 아이가 슈퍼맨이 되기라도 바랬던 것일까.
부끄러운 욕심과 조급함을 던져버리고, 기다림의 아름다움과 훌륭함을 만끽해보기로 했다. 씨는 봄에 뿌리면 가을에 열매를 맺고, 소금은 3-4년간 기다리며 간수가 빠져야 깨끗하고 맛있어지며, 사막은 수십 년간 나무를 심고, 물을 끌어다 주고, 끊임없이 가꾸어 주어야 기름진 땅이 된다. 기다림의 힘을 믿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꾸자 기다림의 시간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늦게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고개 가누는 것, 기어가는 것, 걸어가는 것, 말하는 것 모두 때가 되면 하리라 생각했다. 내가 조급해했다면, 아이도 스트레스 받았을 것이다. 여유롭게 생각했고, 아이의 모든 학습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빠른지, 느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아이의 능력 안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성장했고, 그럴 때 마다 우리는 함께 매우 기뻐하였다
어릴 때는 자연에서 뛰어 놀며 흙의 따뜻함과 나무의 시원함을 마음껏 느끼는 것이 값진 경험이라 생각했다. 아이는 흙장난을 하고,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돌멩이로 공기놀이를 하고, 나뭇잎으로 피리를 불었다. 가끔씩 산에서 만나는 다람쥐와 토끼는 아이의 친구가 되었다. 숲은 아이의 놀이터였고, 아이는 그런 숲을, 자연을 사랑했다. 마음껏 뛰고 놀며 자란 아이의 팔다리는 튼튼했고, 얼굴에는 활기찬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영어, 수학을 가르치기 보다는 함께 책을 읽으며 대화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외우는 공부는 커서도 할 수 있을 테지만, 생각하는 법은 어릴 때부터 익혀두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책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세상을 경험했고, 대화를 통해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 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기도 했는데, 이야기를 나눌 수록 아이의 상상력과 창의력도 커지는 것 같았다.
아이는 공부를 늦게 배워 때로 학교 공부에 뒤처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조급하게 학원을 보내거나, 과외를 시켜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이가 늦는 것이 아니라, 다른 아이들이 빠른 것이었다. 아이는 모르는 것은 물어가며,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아이가 조금 힘겨워 할 때도 있었지만, 스스로 익혀가면서 더 큰 성취감을 느끼는 듯 했다. 기다리다 보면 아이는 어느덧 다른 아이들 못지 않게 잘 해나가고 있었다.
악기, 운동 등의 활동도 아이가 배우고 싶어할 때까지 기다렸다. 아이가 어릴 적 가끔 피아노를 치며 동요를 함께 부르곤 했는데, 어느 날 피아노를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이 생겼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것’ 자체보다는 ‘피아노를 치며 즐기는 기쁨’을 먼저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학원에 보내지 않고, 아이가 좋아하는 동요 중 쉬운 곡들부터 조금씩 가르쳐 주었다. 때로는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내가 노래를 부르고는 했다. 그렇게 아이는 연주하는 즐거움을 배웠고, 커서도 지겨워하지 않으며 피아노 치는 것을 즐거워하였다.
아이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왔었다. 아이는 공부보다도 외모에 더 신경쓰기 시작했고, 나와 대화하는 것도 피하고 싶어했다. 섭섭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지만, 무턱대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평소보다 더 많이 대화하려고 노력했고, 아이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얘기하기보다, 그 감정을 그대로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아이는 다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처럼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욕심과 조급함을 버리니, 기다림이 기다림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기다림의 시간은 원래 있어야 했던 시간 또는 평소대로 흘러가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왜 이렇게 시간이 흐르지 않는가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푹 익어 맛있는 된장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수록 아이는 더 많이 성숙했다. 천천히, 차근차근 아이는 성장했고, 그렇게 커가는 아이를 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아이를 바라본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아이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총명하고, 꽉 다문 입술이 야무지다. 아이는 마음이 넓고, 여유로워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생각은 늘 자유롭고, 기발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명확한 철학이 있고, 열정이 있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는 끈기와 인내로 이겨낸다. 기다림은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삶의 큰 선물이자,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