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교일기) 내가 엄마가 된다면 - 2편. 내려놓음
21세기 초, ‘알파맘’이 유행했다. 알파맘은 아이의 인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미래를 디자인하고 이끌어 주는 엄마를 의미한다. 원래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지만, 각 가정의 자녀 수가 줄어들면서 그 열기가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신문에서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한 알파맘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매우 놀랐다. 자녀를 훌륭한 배우로 키우고 싶었던 한 엄마는 아이가 오디션을 잘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신이 극의 내용, 아이에게 어울리는 배역, 갖추어야 할 능력 등을 모두 분석하여 아이에게 가르쳐주고, 배우게 하였다. 엄마가 아이를 대신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주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정성으로 매번 주연에 뽑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가고 있었다.
자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하나로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것 보다 더 열정적으로 아이에게 에너지를 쏟고 있는 그 알파맘이 대단해 보이면서,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그 엄마는 아이가 자신의 실수로 잘못되면 어쩌나, 늘 마음 졸이며 지내고 있지는 않을까. 아이가 오디션에 떨어지거나, 시험을 잘 못 보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힘이 되는 날까지, 온 정성으로 아이를 챙겨주겠다고 다짐은 하지만, 자신이 아이 곁에 못있어 줄 날이 있을까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어쩌면 알파맘은 자신이 아이를 위해 다 해주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엄마의 당연한 역할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신의 마음이 아프거나, 힘든 것은 괘념치 않으며, 아이가 잘 되는 것은 아이보다 더 기뻐하며 지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엄마와 아이를 위한 일일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 역시 종종 엄마가 나를 대신해 무엇인가를 선택해 준 일들이 있었다. 옷 가게에서 새 옷을 고르는 일은 항상 엄마 담당이었다. 엄마가 골라주는 옷이 좋았고, 내가 이리저리 고민할 필요 없이 옷을 살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대학생이 되고, 사회인이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옷을 살 때면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옷을 살 때마다 어떤 옷을 고를지 고민이 되고, 내가 고른 옷이 정말 예쁜지 확신이 서질 않았다. 하지만 엄마가 매번 같이 있어줄 수 없었다.
옷을 고를 때도, 식사 메뉴를 선정할 때도, 여행 장소를 정할 때도 누군가가 대신 정해주는 일은 참 편하다.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고 그저 따르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선택을 계속 남에게 미루다 보면, 항상 남에게 의지하려고만 하는 어린이로 남게 된다. 수동적이게 되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바보가 되기도 한다. 고민과 선택의 즐거움이 주는 행복도 알지 못한다. 엄마가 매번 옷을 골라줄 때는 몰랐다가, 크고 나서야 깨달은 나처럼 말이다.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은 어느 부모나 갖고 있다. 하지만 아이가 어떻게든 잘 될 수 있게 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대신 선택하고, 다 해주려고 하는 것은 부모의 욕심이다. 아이가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너무 앞서 아이가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선택할 기회를 박탈하면, 아이의 성장도 거기에서 멈추게 된다. 몸과 능력은 컸지만, 마음은 여전히 어리고, 부모에게 기대려 하는 어린 아이로 남게 될 것이다.
아이는 인생의 길에 놓여있는 크고, 작은 선택의 기회를 많이 경험하며 자랐다. 아주 사소한 것부터 아이는 스스로 선택하는 연습을 하였다. 식당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정하는 일, 옷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는 일, 서점에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생신 선물을 고르는 일, 가고 싶은 학원을 선택하는 일, 배우고 싶은 악기를 고르는 일 등등 아이는 매 순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의 것들을 선택해 나아갔다.
크면서는 종교를 선택하는 일, 가고 싶은 대학의 학과를 정하는 일, 이루고 싶은 꿈을 정하는 일도 스스로 선택하였다. 아이는 선택을 하면서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감을 배웠고,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갈 수 있었으며, 선택 후에 오는 기쁨과 좌절도 수용할 줄 알게 되었다.
아이가 선택을 할 때마다 나는 조언자가 되었다. 아이가 한 선택에 대해서는 항상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아이가 무엇을 선택할 지 고민할 때면 각각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고, 장단점이 무엇인지 얘기하기도 했다. 아이가 의외의 선택을 할 때면, 그런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 함께 논의해보고, 그런 후에도 아이가 마음을 바꾸지 않을 때는 아이의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때때로 아이가 힘들고 어려운 길을 선택할 때면, 다른 길로 가게 하거나, 포기하게 하기 보다는 아이가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었다. 경험을 통한 깨달음은 아이의 마음 속에 강렬히 남을 터였다.
나는 ‘베타맘’이 되기를 자처했다. 베타맘은 직접적으로 아이의 삶에 개입하기 보다 아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엄마를 의미했다. 공부도 무조건 해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주기보다는, 스스로 공부할 마음이 들 때까지 자유롭게 두었다.
대신 함께 책을 읽거나, 여행을 가거나,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공부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나는 아이의 성적 앞에 쿨한 엄마가 되었다. 아이가 스스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공부를 할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믿었고, 눈 앞의 성적보다 아이가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법을 깨달아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늘 크고, 넓게 생각했다. 어려서 못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는 언제나 우려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자신의 삶을 선택하며 살아온 아이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으로 자라났다. 때로 잘못된 선택으로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아이는 매번 자신의 실수를 반성하고, 또 다시 일어섰다. 그 때 마다 아이의 마음은 두 뼘, 세 뼘씩 쑥쑥 자라는 듯 했다.
아이는 자신의 선택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후회 없이 사는 어른으로 컸다. 내가 한 일은 아이의 선택을 늘 믿고, 존중하는 것뿐이었다. 믿음은 아이가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왔고, 존중은 아이가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갖도록 도왔다. 아이에 대한 믿음과 존중 앞에 내 욕심과 두려움이 설 자리는 없었다. 나의 믿음대로 잘 커준 아이가 참으로 고맙다. 그리고 자신의 발걸음으로 세상에 우뚝 선 아이가 참으로 자랑스럽다.
(Cover Image from Javier Allegue Barro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