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항공과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의 첫날밤
처음으로 배낭여행을 떠나본 건 아마도 또래들보다는 좀 늦은 2010년 겨울. 3주 동안 120만원의 알뜰한 예산을 가지고 태국과 라오스를 돌아보는 여행이었다. 그 때만 해도 동남아 여행이라면 태국 방콕이나 푸켓 근처의 관광지, 그리고 캄보디아의 시엠립에 앙코르와트를 가는 상품 정도가 있었다. 교보문고에 나와있는 여행기를 이잡듯이 뒤졌는데 라오스에 대해서 서술한 책이 딱 세 권 있었고, 그마저 두 권은 루앙프라방만을 서술하고 있어서 낙심했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3주간 라오스를 가겠다고 한 이유는, 조금 부끄러운 이유지만 장기로 천천히 여행하기에 물가가 너무나 싸서. 120만원이라는 예산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도, 그 말도 안되는 예산으로 비행기값까지 포함해서 모자랄 것 없는 생활이 이뤄진 것이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아서다. 120만원 중에 58만원인가가 제주항공 인천-방콕행 비행기표였는데, 당시의 그 가격도 풀서비스 국적기들에 비하면 말도 안되게 저렴해진 가격이었고, 주 3회 증편이 이루어져서 이벤트 가격으로 몇 만원 할인이 더해진 기억도 어렴풋하게 난다.
인천국제공항부터 방콕 수완나품 공항까지 걸리는 시간은 6시간 30분 가량. 밥도 안 주고 물도 안 준다던데 괜찮을까 걱정하면서 비행기를 탔는데, 의외로 작은 샌드위치와 물 한 컵을 나눠받고 안도했던 기억도 난다. 크리스마스를 기념으로 기내에서 '제주항공에 보내는 편지' 같은 이벤트를 하길래 열과 성을 다해서 엽서를 썼는데, 나는 3등을 해서 1.5L 짜리 감귤주스 한 병을 상품으로 받았다. 당시 제주항공은 제주도가 상당한 지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감귤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도 납득이 되었다. 현재는 유상증자가 계속되면서 지분비율이 많이 낮아졌지만... (확인해보니 2020.3.18. 오늘 기준 7.75%, 사족이지만 국민연금이 5.07%를 보유하고 있다.)
방콕에 내리기 전 탑승객들이 쓴 엽서들을 스튜어디스들이 읽어주었던 기억도 난다. 1등을 했던 기내에서 가장 어린 탑승객의 잔뜩 신이 난 편지, 딸과 함께 푸켓으로 난생 처음 해외여행을 가는 2등 하신 할머님의 편지 내용을 들으면서 여행이란 무엇인가를 몇 번이고 곱씹어보곤 했다. 한편으로 비행 내내 그렇게 로맨틱한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LCC의 개념이 낯설었던 탓인지 커피랑 맥주를 달라 담요를 달라는 어르신 승객들의 요청에 진땀흘리며 저가항공의 개념을 설명하던 스튜어디스들 생각도 난다.
요즈음 일본 불매운동과 코로나 사태가 맞물려 어려워진 저가항공사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많은 서비스가 필요하지 않은 근거리의 동북아/동남아 노선이 활성화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의 혜택을 누리는 데 저가항공사(LCC)들의 공이 참 컸다. 2005년 경부터 제주항공, 한성항공(지금의 티웨이)이 생겨나면서 국내선과 일본노선부터 가격경쟁이 시작되었고, 승객이 늘어남과 동시에 제주 올레길 같은 여행 컨텐츠도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초기에 LCC들이 운용하던 기종이 봄바르디에 Q400 같은 프로펠러 기종이었던 탓에 소비자들의 심리적인 저항이 크던 시절도 있었지만, 2010년 즈음부터는 보잉 737같은 제트기 기종으로 단일화가 이루어지면서 그것도 다 추억이 되었고.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 수 없는데, 6시간 가량의 중단거리 노선 운항이 가능한 보잉 737 기종의 도입에 발맞추어 LCC들의 취항노선도 대폭 증가했다. 제주항공과 진에어가 인천-방콕 노선을 2009년에 처음 개척했고, 2010년부터는 싱가폴, 필리핀, 홍콩, 마카오 등 동남아지역 정기노선 운수권이 배분되기 시작했다. 후에 안 것들이지만, 정기노선을 띄우기 위한 인프라가 되어 주는 항공자유화협정(일명 오픈스카이)이 2006년 일본, 2008년 베트남을 시작으로 아세안 국가들과 차례차례 체결되기 시작하면서 LCC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고.
아무튼 그렇게 해서 무사히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 도착했다. 지금은 에어아시아가 허브로 쓰고 있는 돈므앙 공항이 포화되면서 새롭게 지어진 수완나품 공항은, 당시만 해도 굉장히 새롭고 세련된공항이었다. ท่าอากาศยานสุวรรณภูมิ, 영어로는 Suvarnabhumi airport가 어째서 '수-완나품'으로 읽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태국어로 읽으면 그렇게 되려니 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은 돌아가신 라마 9세, 푸미폰 아둔야뎃 왕이 작명해 하사한 이름으로 '황금의 들판'이라는 뜻이다.
이 이름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다. 당장 푸미폰 왕의 이름에도 땅이라는 뜻의 Bhūmi가 들어가는지라 의도적으로 뜻이 연결되도록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보다도 더 재미있는 건 '황금의 땅'이 산스크리트 전설에서 갠지스 강 동쪽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어지는 풍요롭고 부유하며 다양한 문화가 있는 곳을 이르는 단어라는 거다. 아직까지 다양한 학설과 논의가 있으되 인도차이나 반도 어딘가라고 추측만 할 뿐 고고학적으로 어디인지 밝혀지지는 않은 그 '황금의 땅'을 공항 이름으로 정해서 깃발을 꽂아버린 것은 정말 영리한 작명이라고 할 수밖에. 이름 덕분인지 몰라도 실제로 수완나품 공항은 싱가폴의 창이공항과 함께 동남아의 허브공항 투탑 중의 하나로서 엄청난 수송량을 소화하며 열심히 외화를 벌어들이는 들판으로 기능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수완나품 공항처럼, 지명이 아니라 따로이 이름이 있는 공항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뉴욕의 JFK국제공항이라거나 파리의 샤를 드 골 공항, 로마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공항같이 그 나라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주는 위인 이름을 붙인 것도 좋다. 인천국제공항도 개항할 시절 명칭 공모전에서 1위를 한 '세종국제공항'으로 명명하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심지어 행정소송까지 제기되었는데, 개항의 상징 인천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지역논리에 밀려 유야무야 되어버렸다고 들었다. 하나의 예외라면 도쿄의 하네다(羽田) 국제공항인데, 원래부터 있던 지명을 따다 붙인 이름이지만 공항의 이름이 '날개밭'이라는 것은 어쩐지 낭만적이야.
다시 수완나품 이야기로 돌아와서, 달랑 120만원과 배낭 하나를 맨 채로 12시가 다 되어 방콕에 도착해 새벽 6시 기차를 후알람퐁 역에서 타려다 보니 숙소를 잡기도 안 잡기도 애매한 상황이 되었다. 다행히 10년 전 기준으로 Sleeping in Airports 랭킹 10위 안에 드는 노숙하기 좋은 숙소였던 수완나품 공항은, 온갖 나라의 갖가지 이유로 가난한 여행자들이 옹송그리고 누워서 수다를 떠는 사랑방이기도 했다. 강력한 이름 탓에 아직도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King Power 면세점 옆 벤치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지금처럼 당연하지 않던 시절 작은 수첩에 유용한 정보들과, 그리고 서로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어가면서 밤을 지내던 기억이 아련하다.
스마트폰도 없고 심지어 종이로 된 지도도 귀하던 시절이라,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여행자들이 너덜거리는 지도를 건네며 여행자의 성지 카오산의 분위기를 늘어놓으면, 다음날 버스를 타고 카오산의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 신참 여행자들은 눈을 반짝이며 한 마디 한 마디를 귀에 새겨 듣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도무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 줄 알고 참 겁도 없었지, 혼자 하는 여행은 매 순간 적절하게 경계와 신뢰의 균형을 놓치지 않고 아슬하게 하는 줄타기와 같다. 심심풀이로 같은 웹사이트를 확인해보니 2019년 기준 세계에서 노숙하기 가장 좋은 국제공항은 1위가 싱가폴의 창이국제공항이고 2위가 인천국제공항이지만,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겐 부디 필요 없는 정보이길.
어쩌다 보니 방콕에 도착하기까지만의 글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말았다. 10년 전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냄비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긁어내는 것만큼 수고롭지만 또 그만큼 고소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