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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지우 Apr 05. 2020

이토록 찬란한, 봄의 순간

오쿠무라 토규, <다이고지 벚꽃>, 1972



걷다가 슬쩍 고개를 든다. 머리 위엔 하얗고 투명한 꽃잎이 가득이다. 연한 잎들은 작은 바람에도 물밀듯이 쏟아져내린다. 빛과 꽃잎이 뒤섞인 바닥은 일렁이며 눈이 부시다. 그 순간, 잠시 눈을 감는다. 




Okumura Togyu, Cherry Blossoms at Daigo-ji Temple, 1972




가만히 지나온 시간을 떠올린다. 그 시간 속 함께였던 누군가를. 떠올려도 아무 감흥이 없는 사람도 있고, 이름만으로 일순간 가슴이 내려앉는 사람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남몰래 짝사랑 했던 남자애가 있었다. 큰 키에 흰 피부를 가졌던 그 남자애와 나는 집 방향이 같았다. 어느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그 남자애가 걸어간 뒤로 벚꽃잎이 가만가만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저만치 간격을 두고 걸었던건 떨어지는 꽃잎이 예뻐서였는지 네가 훽 돌아볼까봐 그랬던건지 그때의 나는 몰랐다. 


매번 짝사랑만 했던 고등학생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사랑에 유독 겁이 많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항상 침묵을 지켰고, 끙끙 속앓이를 하고, 사소한 행동 말투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혼자만의 사랑을 지속했다. 날 지긋이 바라보던 그 사람의 시선 속에서도, 내 손을 잡았던 체온 속에서도, 줄곧 사랑의 신호를 놓쳤다. 건조한 표정 뒤에 숨어 나를 지키기에 바빴다. 모든걸 던져 누군가의 세계 속에 주저없이 뛰어드는 타인을 보며 부러움이, 질투가, 화가 나기도 했다. '사랑이란 단어는 내게 애초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되뇌이며 자신을 원망했다. 


후회와 미련을 안고 계절은 돌아 또 이렇게 봄이 왔다. 단단한 방어막을 친 채 사랑을 갈망하는 바보같은 내 머리 위로 벚꽃이 내린다. 연한 벚꽃잎이 무방비 상태인 나를 온몸으로 감싸안는다. 그렇게 나를 향한 원망은 허물어지고 속절없이 또 설레고 만다. 다음 사람이 온다면 이번엔 온몸을 던져 그를 사랑할 수 있기를. 사랑의 신호를 놓치지 않기를. 활짝 핀 벚나무를 바라보며 다시 눈을 감는다. 




글 | 유지우(@yooji_u)

그림 | Okumura Togyu, Cherry Blossoms at Daigo-ji Temple,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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