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돌아보는 뼈아픈 기억들
2003년 11월. 수능을 망쳤다. 잘하면 스카이, 못해도 서성한은 골라갈 거라는 주위(그리고 나)의 예상과는 달리, 3교시 사과탐 시간에 조는(…) 바람에 예상보다 30점이 떨어졌다. 결국, 나는 그 아래 단계 대학의 인문대에 입학하게 된다.(이렇게 표현하는 게 옳을지는 모르겠지만 대체할 표현이 없…)
2009년 2월. 상하이 푸단대로 교환학생을 갔다. 당시 중국어는 ‘니하오’ ‘니츨팔러마’ ‘뚜어샤오치엔’ 정도만 할줄 알았던 나는 어학당 수업을 듣기를 원했으나, 명문(?) 푸단대는 단칼에 거부했다. 우리학교로 교환학생 올 거면 본과 수업을 들을 수준은 돼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그들의 설명. 학점은 D와 C로 도배됐고, 내가 3년간 쌓아온 공든 학점은 한 방에 무너졌다.
2010년 8월. ‘기자를 하자’고 결심한 뒤 한 번에 모 경제 매체 인턴 기자직에 합격했다. 운좋게도 첫달에 특종 여러 건을 잡아내며 꿈을 향해 한걸음 다가섰으나, 글을 못쓴다는 이유로 1달만에 그만(둠을 당했다).
2011년. 모 경제 TV에서 또 인턴을 하게 됐다. 6개월 여 활동하던 도중에 회사의 편성PD 자리가 공석이 떴고, 몇몇 선배들은 ‘너가 원하면 연결해줄게’라고 제안했다. (나의 착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정규직 전환에 대한 환상을 꾸게 됐는데 결국 그 얘기는 없는 게 됐고, 그해 12월 나는 인턴(이라 쓰고 알바라 읽는다)을 그만두게 된다.
2013년 9월. 언론 시험을 통과하고 모 경제지에서 1년 반여 활동하다가 누군가의 표현에 따르자면 ’문닫기 직전의 IT 전문지’로 옮겼다. 멋진 선배들과 동고동락하며 심도 있는 기사를 쓰고자 동분서주했고, 감사하게도 기사를 알아주는 분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월급이 점점 밀리면서 퇴사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 나는 더 이상 기자를 못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자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2003년. 수능을 망치지 않았다면 바닥에서부터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위 시선에 흔들리기 일쑤였기에 좋아보이고, 멋져보이는 직장을 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나, 당시의 전공으로는 갈만한 곳이 마뜩잖았기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자(고 쓰고 막나가자고 읽는다)는 결심을 하게 됐고 중국으로 무작정 떠났다.
2009년. 상하이 푸단대에서 본과 수업을 들으며 그 어느때보다 필사적으로 공부를 했다. 가령 영어 원서를 건네주고 이를 중국어로 요약하는 시험을 본다고 하면, 화교 룸메이트의 도움을 받아 전문을 번역한 뒤 그 문장을 죄다 외워서 답안지를 채우는 식이었다. 1년 뒤 학점과 HSK 점수는 볼품이 없었지만 그때부터 본격 중국어와 중국에 빠지게 됐다. 훗날 알리바바그룹 마윈 회장의 앞을 막아서며 명함 한장 달라고 하게 되는데… 그 깡다구를 이때 배운 듯 싶다.
2010년. ‘다시는 기자직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란 당시 팀장의 서슬퍼런 목소리가 몇년 간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모른다. 또한, 이듬해 편성PD 공석은 다른 사람이 채우게 되면서 나는 만년 인턴으로 남았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들은 나로 하여금 ’마지막으로 기자 시험을 보자’는 결심을 하게 했고, 결국 다음 해 기자로 다시 시작을 하기에 이른다. 그때 계속 기자를 했다면, 혹은 편성PD가 됐다면…무서울 것 없이 뛰어드는, 지금의 내가 있었을까?
2015년 8월. 영원히 일하고 싶었던 IT 전문지가 문을 닫기에 이른다. 5년 전 기자직을 그만 두게 됐던 시절 만큼 절망감이 컸다. 좋은 멤버들과 멋진 콘텐츠를 만드는 것과 매체가 돈을 버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을 직면하게 됐기 때문이다. 허나 동시에 기록하고, 분석하는 기자를 넘어 비즈니스와 비즈니스, 나라와 나라를 연결하는 역할을 꿈꾸게 됐다.
결과적으로 잘됐기 때문에 과거를 미화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배운 건 ‘자신감’이다. 앞으로도 나는 실패를 거듭하게 될 것이다. 동시에 나는 더욱 성장하게 될 것이다. 내가 지난 10여년 겪은 기억들이 소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일을, 미래를 더욱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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