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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정 Sep 27. 2022

춘천, 꿈과 현실 그 어딘가

- 아줌마 대학생

그래, 내가 왔단다.


  2월의 춘천은 너무나 추웠다. 생전 처음 솜바지라는 걸 사 입고 살 집을 구하러 다녔다. 영원히 이곳에 정착하러 온 것이 아니기에 좋은 집도, 그럴듯한 동네도 필요 없었다. 춘천 지리를 잘 몰랐던 나는 부동산 아주머니에게 “춘천교대까지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에 적당한 집이 있을까요?”라고 물으며 그 아주머니의 조언만을

의지한 채 집을 보러 다녔다.

 나는 대학가 앞에서 자취하는 스무 살도 아니었고 홀몸도 아니었기에 가족이 ‘살기’에 알맞은 곳을 찾아야 했다. 아이에게 맞는 어린이집을 구하고 입학 전에 얼른 적응도 시켜야 하며 기꺼이 가평으로(경기도 소방관으로서 춘천에서 다닐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인) 전보를 낸 남편의 출퇴근 거리도 생각해야 했다. 그렇게 전세로 구한 퇴계주공 6단지 아파트는 그 아주머니의 조언대로 주변 환경과의 접근성과 내 생활의 편의성 모두에 적합한 곳이었다. 걸어서 병원도, 마트도, 극장도, 배스킨라빈스도 다 다닐 수 있었고 학교도 2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는 딱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합격의 기쁨 때문인지 뭔지 하나같이 사람들은 어쩜 그리도 친절한지.

크.. 역시 교육의 도시야. 강원도의 지성인들의 집합소. 그 춘천이 두 손 들어 나를 환영한다는 느낌이었다.

춥기도 춥고 덥기도 무진장 더울 이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구나! 그래, 내가 왔단다.


  정신 차려 상황을 둘러본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하나, 교대 4년을 이수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 위함이었다. 이곳에서의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은 학생이어야 했다. 나이 서른에 네 살짜리 딸은 둔 일공 학번 아줌마 새내기. 아무리 치장을 해도 변하지 않을 세월의 흔적에 손을 좀 볼까 싶어 어찌나 어려 보이는 옷을 사 재꼈던지. 나름 동네 보습학원 원장이랍시고 빼입고 다니던 그 A라인, H라인 스커트며 블라우스 등 노티 나는 옷들은 옷장에 처박아 두는 것만으로는 20살들과 어울리려면 아직 멀었다. 매직 스트레이트를 하고 후드티를 입은 나는 언뜻 보면 정말 대학생 같았다.

작은 키 때문에 즐겨 신지 않던 컨버스화도 왠지 잘 어울리는 것 같은 기분에 한 켤레 더 사고 말았다.   

   

 ‘대딩’으로서의 삶

    

  그렇게 시작한 대학생활. 나의 목적은 교대 4년을 잘 이수하여 교사가 되는 것인데 대학교는 나에게 그것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내 머릿속엔 안드로메다로 가버린 새내기 생활, 여자가 70프로가 넘는 교대의 특성상 필연적인 여자끼리의 크고 작은 기싸움, 거기에 하기 싫은 (하지만 너무나 당연히 해야 하는) 초등교육과정 공부에, 음악교육전공(국, 영, 수를 전공으로 하고 싶지 않아서 선택했던) 특성상 1인 1악기를 다뤄야 해서 1주일에 한번 비싼 레슨비를 내며 플루트 레슨까지 받아야 했다. 교대에 정상적으로 20살이 되어 입학한, 이제 막 교복을 벗은 보송보송한 내 동기들의 꿈같은 대학 새내기 생활에 맞장구 쳐주지 못해서 그들을 김 빠지게 하는 일들도 간간히 일어났다. 거기에 수도 없이 많은 모둠활동, 말도 안 되는 보강 스케줄까지. 교생실습은 한 학기에 4주가 잡혀있었고 그 기간 동안 빠진 강의 전체를 정규수업 이후의 시간에 보강해야 했다. 그 빡센 보강 스케줄은 춘천에서 자취나 기숙사 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교대 재학생에게는 고역이었지만 6시 이후엔 집에 가서 아이를 봐야 하는 나에게는 불가능이었다. 교수님들은 애 엄마인 내 스케줄을 고려해 줄 수 없다.

저녁 8시, 6시에 시작되는 보강이라. 남편 외벌이에 장학금을 필수로 받아야 했던 나는 보강 출석을 포기할 수도, 아이를 데리고 수업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교수들에게 ‘저희 아이가 네 살이라서..’라고 말하며 특혜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사정이었고 남편이 쉬는 날로만 보강을 잡아야 하는 나 때문에 보강 스케줄을 조정해줘야 하는 게 불편한 우리 동기들은 나도 불편했다. 넉살 좋은 스타일도 아니고 그들과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며 온갖 수다로 떨며 서로를 탐색하기엔 결국 나이가 문제였는지 그다지 재밌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나를 보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고 어떤 이들은 불편한 나머지 못 본 체  지나가기도 했다. 아! 여자들 세상. 여자가 득실득실한 이곳에서의 ‘대딩’으로서의 삶이 고단했다.    

      

  모든 시간이 다 힘들었던 건 아니다. 국민체조나 뒤구르기, 단소불기나 라인댄스 등은 머리를 쓰는 게 아니어서 그랬는지 재밌었다. 국어교육의 이해, 특수아동교육의 실체 등의 수업시간엔 한도 끝도 없이 마름모를 그리고 앉아있거나 핸드폰으로 불나게 친구와 문자만 해대던 나도 체육과 음악시간은 그렇게 신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처럼 만학도의 꿈을 가진 일명 장수생들은 꽤 존재했다. 그들의 이력은 나보다 더 화려했다. 고대, 이대 졸업생이나 은행원, 호텔리어 등 번듯한 직업을 갖고 사회생활을 하던 이들이 다시 꿈꾸고 도전하여 초등학교 교사'경작소'에서 어린아이들과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는 단순했다. 4살짜리 아기 엄마. 이렇다 할 다른 대학 졸업장도, 변변한 다른 직업도 갖지 못하고 긴 시간 방황만 하다 나이 들어버린. 나 뭐 먹고살지에 대한 고민으로 죽자 사자 매달린 나와 그들은 다른 것 같았다. 대단들 하다.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열망 때문이던, 공무원 철밥통, 꿈의 직업 초등교사를 향한 현실적 자각 때문이던 이미 선택한 경로를 틀어 스무살들과 대학생활을 선택한다는 게 어디 쉬웠을까.


춘천교대 교정에서 노는 큰아이와 둘째 아이

엄마는 그래서 위대하다


  2학년이 되던 해 둘째 아이가 찾아왔다. 입덧이 심했던 나는 아침에 큰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는 것도 힘이 들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교생실습이었다.

겨우 1주일의 참관실습이었는데 하필 입덧이 가장 심해졌을 때와 시기가 겹쳤다. 매 학기마다 두 달에 한번씩 교생을 받아야 하는 교사들의 피로감은 그들의 표정과 말투에 그대로 배어있다. 그들은 한갖 임신한 교생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아침 8시까지 실습받는 초등학교에 가서 이 교실 저 교실을 돌아다니며 뒤에 서서 수업을 참관해야 했다. 유독 속이 좋지 않았던 그날 나는 교실을 옮기는 중 복도에서 토사물을 쏟아내 버렸다.

냅다 화장실로 달려가서 속에 남은 걸 다 게워내고 거울속의 내 몰골과 마주한다.

'나 이 나이에 10살이나 어린아이들과 같이 교생실습하겠다고 이러고 있지'

'왜 또 임신은 해가지고 복도에서 토를 하고 있는거지'

온갖 한탄이 밀려온다.

 그 뒤로도 멈추지 않았던 입덧은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내 꿈도 귀찮게 만들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요량으로 휴학을 했다. 그리고 출산.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이 돌아섰지만 변덕이 이끈 내 삶에 어울리게 난 또 학교가 그립다. 둘째 아이 5개월이 된 다음 해 3월 다시 복학을 한다.

학교가 그리운 것도 있었지만 이미 다니다 그만둔 학교가 2개, 심지어 공무원 생활까지 그만두고 와서 또 학교를 그만두며 내 인생을 다 잘라져 버린 면 가락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큰아이 하나였을 때도 힘들었던 교대 생활에 갓난쟁이까지 더해졌으니 출석만 잘해서 졸업만 하자 싶은 마음으로 다시 학교를 다녔다.

그렇게 학교는 내 현실이자, 꿈이자 또 내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엄마는 그래서 위대하다고 했나. 그 해 1학기에 나는 과 수석을 했다.   


옆에 서있던 저 장애인 아저씨

   

마음에 맞는 친구들이 생기고 나의 아줌마 교대생활도 익숙해지고 나는 4학년, 큰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춘천교대 바로 앞에 있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아이를 자주 자전거로 태우고 등하교를 같이 했다. 어느 날 큰 아이가 내가 탄 자전거 뒤에 타고 있다가 뒷바퀴에 다리가 걸려 복숭아뼈에 살짝 금이 가서 깁스를 해야 하는 사고가 생겼다. 큰 사고는 아니지만 다리가 불편해진 아이는 내 다리를 의지해야 했다. 나는 아침에 큰아이와 작은아이를 챙겨 11층 우리 집을 나와서 큰아이는 1층 현관 앞에 잠시 세워두고 작은아이를 옆 라인에 있는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와서 큰아이를 업고 학교에 데려다주던 일을 2주 정도 해야 했다. 그날도 같은 패턴으로 1층에 아이를 두고 작은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고 왔을 때 큰아이 얼굴이 굳어있었다.

“엄마, 저 아저씨가 날 만졌어”

“누가?”

“옆에 서있던 저 장애인 아저씨”

“어디를?”

“밑에.”

7층에 살던 지체장애인 역시 1층에서 그의 부모가 차를 가지고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둘만 남겨진 채로 채 1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나 보다.

말 그대로 난리가 났다. 아이와 나는 학교 선생님에게 일을 알렸고 학교에서는 바로 지역사회 해바라기아동센터라는 곳으로 연결이 되었고 여경과 상담사와 함께 상담을 진행했으며 경찰이 현장에 방문해서 조사를 했다. 순식간에 처음 겪는 일이 발생했지만 다행히도 아이가 받은 충격은 내가 받은 충격보다 작았다. 나는 그때부터 밥을 한 숟가락도 먹지 못했고 죽도 먹지 못해서 한의원에서 가르쳐준, 백설기를 갈아서 다시 죽을 만든 ‘암죽’이라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아이는 별 상처 없이 그 일을 입 밖으로 꺼냈고 평상시로 돌아왔다.

아이를 자전거에 태운 것부터 1층에 세워둔 것까지 온통 나를 뒤덮고 있던 죄책감과 그들을 향한 분노에 당장 고소를 결정했지만 남편은 반대했다. 그 사람들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게 그의 이유였다. 그 사람들의 인생 따위가 뭐가 중요하단 거지. 어디서나 누구와도 다투고 싶어 하지 않는 그 사람의 소극적인 태도에 화가 치밀었다. 우리는 고소를 하지 않는 대신 이사해 줄 것을 요구했다. 가장 안전한 공간이어야 할 곳에서 나를 건드린 괴물과 살아야 하는 공포로 살아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그것을 뻔뻔하게도 거절했다. 그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남편에게 우리가 이사 갈 테니 이사비용을 달라고 그들과 합의를 보라고 했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러 그 집에 간 남편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심히 내려가 본 7층 현관 밖에서는 남편의 떨리는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남편은 울다시피 그들에게 우리의 상처를 토하고 있었다.

남편이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는 모습을 나는 이날까지 본 적이 없다.


자식에게 일어난 일은 나를 병들게 만들고 남편을 그가 아닌 그로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는 그들이 준 이사비용으로

갑자기,  춘천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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