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던 그것
난 비교적 건강한 편이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틴 건지도 모르지만 체력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단 한 가지, 위가 언제나 말썽이었는데 이건 예민한 내 성격과 관련 있다고 하니 뭐 별도리가 없어서
아팠다 말다 아팠다 말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큰 아이에게 그 일이 생기고는 위기 제대로 고장이 났다.
죽도 못 먹는 상태가 지속되자 살아야겠어서 한의원을 찾았다.
친절한 의사 선생님의 침술과 한약 덕에 나는 점점 기력을 회복하고 있었고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다시 눈앞에 보였다.
나는 아직 4학년으로 학교를 1학기 더 다녀야 했지만 춘천에 더 이상 머물지 않기로 결심했다. 얼마 남지 않은 학교생활에 다른 집을 계약하기도 애매했고 4학년 수업은 다른 학년에 비해 여유가 있었기에 다시 엄마와 언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통학하자 마음먹었다.
당연히 정이 뚝 떨어진 그 동네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게 모든 이유에 우선이었다.
경기도로 이사를 오고 7월 어느 날 예사롭지 않은 울렁거림과 메슥거림을 느꼈다. 위가 또 탈이 났구나.
한약으로 효과를 봤던 나는 근처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었다. 그런데 이번엔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이젠 음식을 쳐다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왜 이러지. 정말 이제 큰일이 난 건가. 불안한 마음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가서 거울 앞에 섰는데 어라. 어디서 많이 봤던 것 같은 내 몸이 익숙하다. 두 번의 경험으로 직감할 수 있던 그것.
임신이었다.
셋째가 찾아왔다.
이따 오후엔 다시 못 오겠구나
울렁거림을 입덧으로 생각할 수 없었던 건 첫째와 둘째 모두 과배란과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얻은 이유였다. 생리불순은 평생 따라다녔고 자연임신은 그 덕에 상상할 수도 없었다. 춘천에 있던 한의원의 친절한 의사 선생님은 위뿐만 아니라 다른 기능에서도 건강을 찾게 도와주셨나 보다.
실로 충격적이었다.
아직 교대 생활이 반 학기가 남았기 때문에 일주일에 서 너 번은 왕복 세 시간을 운전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11월에 임용고시를 앞두고 있었기에 사실 이건 절망 수준이었다.
왜 나에겐 끝도 없이 '사건'이 일어나는 거지.
둘째가 네 살이었고 육아의 끝이 점점 보이는 중이었으며 몇 달 후에는 드디어 선생님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소식이었다. 아이는 둘로 충분하다.
아침부터 시작된 입덧에 밥을 한 그릇 가득 먹고 병원을 갔다.
"제가 아이를 낳을 체력이 안 돼서요."
"가족계획이 그러시다면 도와드려야죠."
체력이 안 된다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완전 계획된 수술임을 강조하던 의사는 수술의 주의사항을 알려주며
"당연히 빈 속 이시겠지요."
"네? 아닌데요, 아침 먹었는데..."
의사는 냉담하게 말했다.
"그럼 지금 수술 못합니다. 점심 드시지 말고 오후에 다시 나오세요."
나한테 왜 아무도 아기를 지우는 수술 하러 갈 땐 밥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인터넷만 뒤적거렸어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였을 텐데 왜 또 난 그냥 그렇게 무대포로 병원을 간 걸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렀다. 다시 그 병원을 가지 않을 걸 알고 있었기에. 한 번은 가도 두 번은 못 가겠던 그 길. 미친척하고, 할 수 있다고 나에게 최면을 걸며 내 아이를 지우기 위해 찾아간 병원. 이따 오후엔 다시 못 오겠구나.라고 의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생각했다. 뱃속의 셋째에게 미안한 마음은 돌아와서 남편에게 내가 아는 모든 욕을 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아이를 낳기로 결심한다.
그 뒤로 셋째 덕분에 당첨된 아파트, 셋째 덕분에 면제 받은 자동차 취등록세, 또 셋째 덕분에 배려받은 많은 다둥이 특혜들을 누리며 크. 역시 현명한 선택이었어라며 기뻐하는 나를 본다. 눈에 넣어도 안아플 만큼 예쁜건 덤이었다. 뭔가 앞뒤가 바뀐것 같지만.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느껴지던 그 시간에도
그렇게 나는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오가며 4학년 2학기를 보냈다.
'내가 아기 엄마란 걸 말해서 교수에게 특혜 받을 생각은 없어!'라고 떨어대던 오만은 어디 가고 교수들에게 안 그래도 나온 배를 디밀며 세상 가장 고단한 사람의 표정을 짓고 내 사정을 읊는다. 대부분은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출석일수를 조정해주거나 리포트로 대신해주었다. 그런 배려에도 정말 많이도 울었던 그 시절. 내 삶이 차암 고단했다.
임용고사가 치러진 날,
수원의 어느 고등학교 앞에 많은 부모들이 교문 앞에 와있었다. 많은 엄마 아빠들은 인생의 중대한 시험을 치른, 다 큰 아들 딸의 등을 토닥이며 안고 돌아갔다. 얼마나 기특할까. 우리 엄마 아빤 저들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다는 생각에 약간 씁쓸하다. 그런데 나 역시 반가운 얼굴이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 큰딸이었다.
셋째를 뱃속에 품고 시험을 보니 큰딸이 서있었다. 엄마를 보고 환하게 웃어주던 아이와 아빠 차로 같이 가보니 둘째는 차에서 자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유별나게 사는 것 같았던 매 순간에도,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아무것도 이뤄놓은 것 없이 느껴지던 그 시간에도
나에게 가족이 이렇게 자라나고 있었구나.
나만 애쓴 게 아니었구나. 그리고 그 고된 시간들을 너희들로 이렇게 보상받는구나.
가장 좋은 고깃집에서 고기를 사 먹고 마트에 들러 아이들 옷을 한 아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임용고사가 끝나고 면접과 수업시연이 남아있었다. 셋째는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고 쌍둥이냐는 말도 많이 들을 만큼 배가 유독 컸다. 아이는 내 배안이 비좁은 듯 마구 나를 차 댔다. 공부하느라 몇 번 하지도 못한 태담을 수업시연하러 가는 차 안에서 아이와 나눈다.
“너 가만 안 있을래? 어쭈, 이번엔 오른쪽이야? 너 이따가도 이럼 가만 안 둬 그냥!”
내 차례는 한참 뒤였고 고맙게도 같은 교실에 앉아있던 예비교사들의 배려로 나는 가장 처음 순서로 수업시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합격하세요!!”라고 적은 쪽지를 몽쉘과 음료수가 든 작은 봉투에 담아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전했다. 임신은 개인적인 일인데 운 없게도 나와 같은 반에 배정받아서 원치 않게 순서가 밀려난 억울함과 지루함이 그 쪽지와 초코과자로 달래졌기를 바란다. 그렇게 난 셋째 출산 하루 전에 분당의 한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말 그대로 우여곡절 끝에 교사가 되었다.
임용고사를 치른 날 큰아이가 쓴 편지